45.

“군중이라 접대가 소홀하였음을 용서해주십시오. 내일은 헤투알라성을 열고 호궤하는 날이라 여러 사람이 오가고 분주할터이니 혹여 니탕개와 그 수하의 눈에 띄일까 염려되옵니다. 군중 일때문에 몸을 못빼니 저 대신 원외님이 강건너까지 모셔다 드릴 것입니다.”
“그놈을 잡아내자 하여도 장군께 누가 될까 저어되어 이대로 떠나겠소. 하지만 니탕개가 빠져나가면 나중에 꼭 큰 해가 될터이니 장군께서도 부디 유념해주시오.”
“어르신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다시 볼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난중의 조선을 돕겠다는 장군의 그 약조는 내 기억하리다.”

담담한 어조로 배웅하고 배웅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달빛을 타고 희미하게 서은의 눈안으로 들어왔다. 한 사람이 장정들을 거느리고 떠나고 나머지 한 사람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다가 몸을 돌려 영채쪽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그가 중도에서 서은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주춤했다 .그러더니 그녀를 향해 싱긋 웃는다.

“왜 여기 있었어. 어르신께 작별인사를 하지도 않고.”
“그분께 저는 잊혀져야 하는 존재이니까요.”

소리 없는 낮은 한숨과 함께 그녀도 영채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찌 참군님의 호송에 지휘사님을 보내지 않고 원외님을 보내셨습니까.”
“형님한테는 더 중요한 일을 부탁할테니까.”

그의 종잡을수 없는 말에 그녀는 살짝 머리를 기웃했다가 다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잠자코 그녀와 어깨 나란히 걸었다. 그러다 수림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양 그가 그녀옆에서 걷던 자리를 바꾸었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에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바싹 붙어선 것도, 그 어떤 접촉이 있은것도 아니었지만 그 어떤 단단한 존재감이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상처가 채 낫지 않았으니 바람받이는 피하세요.”

그녀가 입을 열자 그는 엉뚱한 말로 받았다.

“2년이라고 했지.”
“네?”
“당신이 머물러 있을수 있는 시간이…2년이라고 했지.”

기어이 기억하고야 말고, 또 기어이 입밖에 꺼내야만 하는가 하는 눈길로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걸음이 부지중 멈춰졌다.

“그건…”
“이제 남은 시간은 7일, 북두칠성에 수를 빌어야 하는 날짜도 옹근 7일이 걸려.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것도 준비해놓지 않았어.”

둘사이에 길게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후 조용히 그것을 깨는 그녀의 음성이 차분했지만 물기에 젖어 있었다.

“하지…않겠습니다.”
“…”
“수를…빌지 않겠습니다.”
“…”

그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들은 말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텅 빈, 그래서 슬퍼보이기만 한 얼굴로.

“그건 왜…”
“참군님을 보십시오. 저분처럼 거룩하신 분도 자신의 운명을 인지하고 그대로 받아들이시는데, 우리가 뭘 어떻게 할수 있다고…”

웃는듯 마는듯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을 스친다. 그리고는 곧 싸늘히 지워버리는 그녀를 향해 그가 애써 침착한 기색을 짓는다.

“당신…아직도 농을 할 기분이 있어?”
“농이 아닙니다. 진지하게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침착한 표정도 거두어졌다. 그가 앞으로 다가서서 그녀의 어깨를 잡는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럼 그날은…”
“단지 당신을 안정시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야만 누르하치와의 싸움에서 이길수 있으니까요.”

그의 미간이 깊이 구겨졌다. 그리고는 절대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로 그가 그녀를 놓더니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의 끝은 그토록 처절했다.

“거짓말…이었나.”
“나쁜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이생에서의 제 사명이 끝난 듯 합니다. 누르하치를 놓아버린 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제가 벌려놓은 일은 제 자리에 되돌려놓으려 노력했습니다. 신충일의 묵죽도, 명교의 해체, 오라버니의 태정, 이태후의 참정, 우리 아이, 그리고 이순신장군님의 거북선은 역사 그대로 완성되게 최선을 다했구요…이제 나치야와 당신만이 남았습니다.”

그녀는 말을 끊고 멀리 영채쪽을 돌아보았다.

“나치야는 내일 광녕사에 되돌아 가겠다고 합니다. 누르하치가 찾아오면 이것을 전해주라고 합니다.”

그녀가 소매속에서 깁에 싼 뭔가를 꺼냈다. 그의 시선이 그녀가 꺼내든 물건으로부터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옮겨졌다.

“나치야가 드디어…”
“네, 만가닥 정을 끊고 진정 불가에 귀의하겠다 합니다. 저로서는 더이상 막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방금전 나치야를 만났을 때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불교에 귀의한 그 결연하고 단호한 얼굴을.

“이제 다시 만나면 저희는 어떤 사이로 만나게 될까요.”
“아주 허물없는 친구 사이로요.”

그녀는 이리 대답했었다. 그녀는 나치야의 머리카락을 깁에 싸서 다시 조심스럽게 소매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그의 찌푸러진 얼굴을 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당신은…”
“나더러 평생 영혼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그가 처연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절망이 생생히 느껴졌다. 하지만 이젠 더이상 늦출수 없다. 다가오는 이별의 날을 위해, 언젠가는 이 남자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 그래야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불상사가 없을테니까.

“그래도 저를 위해 기뻐해 주십시오. 돌아가게 되었지 않습니까. 저의 아버지도 볼수 있고…이젠 더이상 혼수상태로 누워있지 않아도 되고…”
“당신의 전생인 서안공주는…자결로 생을 마감했어.”

그가 나직히 내뱉는 말에 그녀는 눈섭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진정을 회복하고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서요.”
“명부의 규정을 당신도 모르진 않을터. 자고로 자결로 생을 마감한 사람에겐 환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그럼 저는 뭘까요.”

그녀가 고개를 기웃했다. 뭔가 알듯말듯 했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그는 이 뭔가를 알고있을까,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저는 서안공주의 환생이 분명하지 않나요? 그리고 전생의 일을 마감하지 못해서 명부에서 후생의 저의 시간을 빈거구요.”
“그건 염라대왕의 말일뿐이야. 하지만 명부의 규정은 염라대왕도 고칠수 없어. 만일 당신이 서안공주의 환생이라면, 서안공주는 자결로 죽은 것이 아니였어.”
“그렇다면 누가 모살이라도?”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짙은 눈빛에 그녀는 비로소 뭔가를 알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을 돌렸다.

“그럼 지금은 제가 서안공주인 셈이니…곧 제가 죽는다는 건가요. 서안공주의 환생인 현대의 저도…같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어쩌면 돌아갈수 있을 거라는 한가닥 막연한 기대도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예상치 못한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서글프기도 했다. 아직 죽기에는 하고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억울하기도 했다. 이생에서도, 현대에서도…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면…

“인생은 자고로 누가 죽지 않겠어요.”
“그래서 당신 돌려보내려 했던 건데.”

그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의 단정한 눈길에 퍽 따뜻한 빛이 머물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응시했다. 몇일전 수림밖 둔덕위에서 그와 다툼을 벌였던 일이 생각나서 그녀는 귀밑을 붉혔다. 어쩌면 그가 지키고 싶었던 건, 오로지 그녀의 목숨이었으리라.

“그러니 당신 꼭 북두에 수를 빌어야 해. 내 눈으로 본명등이 켜져있는 걸 확인해야겠어. 더이상 염라대왕의 약조는 믿지 못하니까.”

그의 눈빛이 단호하게 변했다. 그녀는 더이상 그의 시선을 바라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여 발밑을 내려다 보았다.

“그런데 나…아무 준비도 안했는데요.”
“그럴줄 알고 준비해뒀지.”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에 따로 서있는 검은 장막이 그제야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어둠속에서 검은 장막은 그녀를 향해 입을 벌리고있는 크다란 동굴과 흡사했다.

“검은 옷을 입은 갑사 49명, 검은 기 49개, 향화제물, 큰 등잔 일곱개와 작은 등잔 49개, 그리고 큰 본명등 하나…또 뭐가 있지?”

그의 말에 그녀는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어찌 기양법을 이다지도 소상하게 아시는 겁니까.”

그가 아무 말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없는 웃음에 그녀는 문득 알아차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군님이 참 여러모로 도와주시는군요.”

그녀는 검은 장막 입구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럼…제게 7일간의 시간을 내어주셔야겠습니다.”

서로에게 마지막일수도 있는 시간을…그녀는 소리없이 되뇌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을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싶지 않은 그의 마음을 그녀는 알고있었다. 그의 마음이자 그녀의 마음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다르다. 그는 그녀의 목숨을 빌고싶지만, 그녀는 이생에서의 시간을 빌고싶은 것을.

……

누르하치는 성문을 활짝 열고 3일동안 삼군을 호궤했다. 누르하치가 항복한 후 이여백은 그에게 예허의 나린부루와 니탕개의 잔여군을 돌려보내라고 명한 뒤 군사를 거두어 7일동안 휴식하게 했다. 이 모든것은 갑사들을 거느리고 서은의 호위를 책임진 우사가, 7일째 되는 날 저녁에 장막안의 서은에게 전해준 내용이었다.

“오랜 대치끝에 군사들이 지쳐있을 터이니 쉬었다 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요.”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서은이 말했다. 촛불이 휘황한 장중에 올연히 앉아있는 그녀를 우사는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

“동가가 위급하여 이장군께선 추잉을 성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나치야는 광녕사로 돌아갔구요.”

그는 아무 말 없는 서은을 한참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저 또한 행장을 수습하고 바로 하직을 고할까 하옵니다. 부디 강녕하시옵소서.”

서은은 눈을 들어 흘깃 우사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언뜻 이해 안된다는 기색이 스쳤으나 금세 사라졌다.

“지휘사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녀는 우사의 모습이 장막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기다려 다시 천천히 본명등을 마주했다. 등에서 투닥투닥 타오르는 붉은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노을빛으로 물들였다. 그녀는 본명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머리를 숙이고 경건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오늘이 바로 7일째입니다. 이대로 오늘밤을 무사히 넘기면, 저는 이곳에 머물러도 되는 것으로 알고있겠습니다.”

장막안의 진하고 무거운 공기가 그대로 고스란히 그녀를 억압했다. 다시 시선을 타오로는 본명등 불길에 둔 채 그녀가 말했다.

“저는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살아서 인연을 이어가지 못할바엔, 차라리 죽어 그 그리움을 남기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장막안에 붙여놓은, 북쪽 방위를 표시한 일곱개 별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수명을 장관하는 북두칠성…과연 인간의 명을 장관하는 명부의 권한을 뛰어넘을수 있을런지…만일 그리하다면 현세에서의 몇십년을 차감해도 좋으니 차라리 이생에서의 자신의 시간을 늘여주면 좋으련만.

“제가 비록 불미하오나 세상만사가 인간의 마음대로 안되는 법은 알고있으며, 수차 천기를 누설한 죄로 제 명수가 다한것도 알고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북두에 수를 비는 것은 절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외로이 홀로 남을 한 사람의 지우지은(知遇之恩)에 보답하고자 함입니다.”

문득 본명등의 불이 확 밝아져서 장막안을 환하게 비추는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놀라 머리를 드는 틈에, 휘익 하고 불어들어오는  찬바람과 함께 본명등의 불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깐 멍해있다가 이를 막으려고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모든것이 허사였다.

“공주님…소직은 이길로…”

장막을 제끼며 누군가의 발걸음소리가 다급히 울렸다. 그바람에 가물거리던 큰 등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아예 사그라지고 말았다. 앞으로 뻗친 그녀의 팔이 허공에 맥없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잠깐 마음을 다잡은 후 평온한 얼굴로 들어온 사람을 마주했다.

“지휘사님, 어찌 또 오셨습니까.”
“공주님…등이…등이 꺼졌습니다.”

우사는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본명등을 가리켰다. 그 황망한 모습에 서은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사를 마주한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모든것은…하늘의 뜻입니다.”
“공주님…저를 죽여주시옵소서…”

우사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표정에 놀라움과 자책감, 그리고 두려움이 차례로 스쳐지나갔다. 묵묵히 그를 보던 서은은 짐짓 안온한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기대로 인해 약간은 들떴던 마음이,역시라는 생각과 함께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이젠 철병(撤兵)해야지요. 혼자 먼저 가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지휘사님.”

뭔가 비명이라도 지르고싶은 크다란 설음을 몸속 깊은 곳으로 밀어넣으며 그녀는 찬연하게 웃었다. 장막밖에서 그녀의 미소를 닮은 아침해가 조용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잠시 비밀로 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

우사를 장막밖으로 내보낸 서은은 피곤한듯 눈을 감았다. 장막밖으로 막 떠오르는 아침해가 그녀의 얼굴에 한줄기 눈부신 빛을 던져준 탓이리라.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은 그녀의 귀가에 관군의 개선을 알리며 군중에 울려퍼지는 청량한 호각소리가 들렸다.

바로 오늘이 돌아가야 하는 날이다. 관군은 총병부로 돌아갈 것이며, 그녀 또한 어디론가 갈 것이다. 그것이 명부가 되었든 현대가 되었든, 확실한 것은 그녀가 더이상 여기에 머물지 못한다는 점이다.

갑자기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서서히 본명등 앞으로 다가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부시를 쳐서 본명등에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로는 불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그린듯이 서있던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등이 켜진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이젠 나오십시오.”
“알고있었구나.”

그녀의 등뒤로 뭔가 오싹한 차거운것이 스쳤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도 그녀는 그 존재가 무엇인지 알수 있었다. 등뒤의 존재는 흥 하고 냉소를 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북두에 수까지 빌다니. 내가 그동안 너를 너무 방치해 두었구나.”
“방치해 두었다면 대왕께서 지휘사님을 이용하여 굳이 등을 끄진 않았겠지요.”

그녀는 냉랭하게 대꾸한 후 천천히 몸을 돌렸다. 텅 빈 공간에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정확히 장막앞 어딘가에 시선을 주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감지할수 있는 염라대왕을 향해 그녀는 허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 드디어 저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려는 건가요.”
“그만큼 천기를 누설하고도 목숨을 부지하려고 생각했더냐.”
“천기를 누설하지 말게 하려면 애초에 저를 여기에 데려오지 말았어야죠.”
“애초에 네가 맹강탕을 마셨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것이다.”
“맹강탕…”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들어 장막 어딘가를 보았다.

“애초에 대왕님께서 일부러 맹강탕을 내어주지 않은 것을…저는 잘 알고있습니다.”

그녀는 본명등앞을 떠나 장막 문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긴 도포 옷자락이 사박 소리를 냈다. 장막안은 물뿌린 듯 조용했다. 탄식 비슷한 한숨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저는 명부에서 배치한 바둑알 같은 존재였다면서요…명부에선 현대의 기억이 있는 제가 고대에 와서 역사 그대로를 완성시키길 바란 것이 아닌가요? 그게 제 사명이 아닐까요?”
“…”
“대왕께서 이렇게 자주 찾아오는 시간이면, 한번쯤은 저를 명부로 다시 데려가서 맹강탕을 마시게 할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대왕께선 누차 찾아와서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는 경고만 했을뿐, 단 한번도 이단락의 역사에 대한 제 기억을 없애려는 생각은 안하셨습니다.”
“…”
“제 사명이 이단락의 역사를 완성시키는 일이라면, 오늘에 이르러 저의 이용가치도 끝나야 하는 거겠죠. 누르하치, 나치야, 만력황제, 신충일, 이마두신부, 이순신장군까지…지금 모든것이 역사사실 그대로 맞춰 가는 것이고, 그중에서 옥의 티라면 이여백…그 사람이 명부의 이런 계획을 알아버렸다는 사실이겠죠.”
“…”
“그러니 이젠 어떡하실 겁니까, 대왕께선 자금성 어화원에서 저에게 한 약조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의 유일한 마음을 가진다면, 저는 제가 살던 세상으로 무사히 돌아갈수 있다고…”
“…”
“천기를 누설하면 죽는다는 말은, 대왕께서 저를 협박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곳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일들을 알려줄까봐, 그로 인해 명부의 질서와 관리가 흐트러 질까봐…대왕께서 두려워하는건 이것이었고, 또 하필이면 그 사람이 모든것을 알게 되었겠죠.”

그녀는 말을 끝맺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부터 지속된 염라대왕의 침묵에 숨이 막혔다. 그리고 그 침묵으로 인해 느닷없이 돋는 소름에 그녀는 입안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저를 죽이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그 사람만은, 부디 그 사람만은 건드리지 말아주십시오.”
“또 알았느냐.”

꿈에서 깬 듯 눈을 바로 뜨고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 그녀는, 아침햇살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염라대왕의 비릿한 미소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했다.

“명부책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천기 원년에 수가 다합니다. 아직 30여년이란 시간이 있습니다. 대왕께서 아무리 명부의 최고 자리라 해도, 죽음을 다스리는 북두의 뜻을 결코 거스르진 못할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할 방법도 없으면 헛되이 명부의 최고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무슨…말씀이옵니까.”

그녀는 으스스 몸이 떨려왔다. 뭔가 차거운 것이 마음속 깊숙히 스치고 지나갔다. 장막문 사이로 소리없이 바람이 스며 들어왔다. 그 바람을 따라 열린 문틈으로 하늘을 보았다. 노랗게 색바랜 하늘을.

“그 사람을…다쳐선 안됩니다.”
“그러면 이생에 외로이 혼자 두겠느냐.”

염라대왕이 또 한번 비릿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머리가 텅 빈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할수 없었다. 그냥 세차게 머리를 가로저었을 뿐이다. 말도 안돼, 지금껏 무엇을 위해 싸워왔는데…

“그렇다고 그 사람을…감히 하늘의 뜻을 거스른단 말입니까? 단순히 명부의 질서를 위해서?”
“하늘의 뜻을 거스르다니? 난 단지 이여백의 계책을 써주려는 것 뿐이다.”
“…”
“진진가가, 허허실실…세상에 가짜 이여백이 있으면 안된다는 법은 누가 만들었느냐. 진짜 이여백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또 누가 만들었느냐.”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염라대왕의 표정은 말할나위 없이 싸늘했다.

“너는 이젠 너의 세상으로 돌아가거라. 모든것을 다 알고 움직여주는 진짜 이여백보다, 아무것도 모르고 명부가 조종하는대로 움직이는 가짜 이여백이 더 유용할 것이다. 이여백 역시 다 아는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는, 이생에서 수를 다하여 새로운 삶을 기약하는게 더 좋지 않겠느냐.”
“명부에선 이렇게 사람을 이용하고 버리는군요. 이거야말로 강을 건느자 다리를 허무는 격이네요.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명부는 그 사람의 삶을 선택해줄 권리가 없습니다. 절대로.”

그녀가 부드득 이를 갈며 하는 말에 염라대왕은 얼굴을 들고 크게 웃었다.

“이것이 너희들이 내 뜻을 거스른 후과다. 그럼 너희들은 그 누구 하나 목숨을 내놓을 각오도 못하면서 여태껏 명부에 대항을 했었더냐? 명부가 그렇게 만만한 존재였냐.”
“차라리 제 목숨을 거두십시오…”

그녀의 목소리가 분노를 넘어서 절박하게까지 들렸다. 그녀는 무심한 얼굴의 염라대왕을 노려보다가 처연히 시선을 내렸다.

“누군가의 목숨을 거두어 명부의 체면을 되찾으려면, 명부를 우습게 여긴 제 목숨을 거두십시오. 그 사람…가여운 사람입니다. 외로이 이 세상에 남아서 다 아는 자신의 삶을 목적없이 살아가야 하고, 역사에 기재된대로, 명부가 원하는대로 자신의 생을 마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 괴로운 삶에서 자유로워 지도록 해탈을 시켜주겠다.”
“그 판단을 왜 대왕께서 하시는 겁니까? 명부에선 수를 관리할뿐, 수를 정하지는 못합니다.”
“내 오늘 너에게, 명부에서 그 수를 정할수 있음을 제대로 보여줄 것이다.”

얼음처럼 차거운 표정으로 염라대왕이 말했다. 바로 그때 장막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염라대왕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
“아직 켜져있군.”

이여백은 분위기를 눈치 못챈 듯 본명등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녀는 잠시 할말을 잊었다. 그의 다정한 얼굴을 보니 괜스레 설음이 괴어올랐다. 왜 하필…명부에선 그를 놔주지 않는 걸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여전히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듯 이여백이 본명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잠자코 그에게 다가간후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등이 꺼지지 않았다 해도…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몰라요.”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런 미지의 세상이야. 그래서 등이 켜져있길 원한 거고.”

그는 쓸쓸히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사실 그동안 많이 생각했다. 앞으로의 행보를 다 아는 한, 나는 과연 행복할수 있을까고.”
“…”
“나약한 생각인줄 알면서도, 나는 내 삶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기 싫어졌다. 뭔가 목표와 희망을 가지고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사라졌다."
“…”
"당신이 여기 있는 시간이 일년이 되든 십년이 되든, 그 동안에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든 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난 당신과 함께 있는 순간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외에 내게 중요한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마음을 안다. 충분히 안다. 그에게 모든것을 알게 하고, 또 아무것도 못하게 하였으니.

“그동안 누르하치는 요동에 후금을 세우고 정식으로 칸이 될 거에요. 명은 차츰 무너지고 청이 일어설 거고. 나라의 흥망엔 필부도 책임이 있다는데…그런 약한 생각을 하셨다니.”

사실 이런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녀가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임을. 그는 그녀의 어조에 가려져있는 슬픔을 여전히 알아채지 못한 듯 말했다.

“이젠 아니야. 당신이 있는, 당신이 남아있는 이 땅을 내가 지켜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뭔가 단단한 결의 같은 것이 스쳤다.

"누르하치가 칸이 되고 나라를 세우는 걸 막지 못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젠 더이상 요동이 동란을 겪지 않고, 사람들이 고초를 겪지 않도록 내가 막을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막을 건데요?"

출사를 거부하던 그가, 명리에 담백하던 그가, 이 땅을 지켜려는 결의는 지금 시작인건가.

"아버님의 뒤를 이을 것이다. 요동의 총병이 되어, 누르하치를 견제할 것이다.”

그녀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기다려왔던 이 말, 그리 될 것이다. 그는 요동 총병이 되어, 누르하치와 사르후 전역을 치를 것이나, 누르하치를 완전히 견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번 사르후 전역에서 그는 누르하치에게 패배하게 될 것이니까.그뒤로 몇십년 이어진 은퇴와 최후의 자결, 그것은 그번의 사르후전역 패배로 인한 것일까. 역사에서 이여백이 죽자 누르하치가 요동엔 더이상 자신을 막을 장수가 없다고 크게 잔치까지 벌렸다는 일화를 떠올리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은 것은 당장이라도 울것 같은 표정을 숨기고 싶은 것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장막밖에서 왁작 떠드는 군졸들의 소동이 그들의 대화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잠깐 미간을 찌푸리던 그는 그녀의 손을 다독인 후 장막밖으로 나섰다.

“어찌 이리 소란스럽느냐.”

이여백이 묻는 물음에 군졸이 황망히 대답했다.

“장군님…저기를 보십시오.”

군졸이 가리키는 곳에 눈길을 주던 이여백이 잠깐 침묵했다. 그를 따라 장막밖을 나선 서은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그녀는 잠시 휘청거렸다. 낮게 깐 목소리로 이여백이 입을 열었다.

“어찌된 일이냐.”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넘어갔습니다. 실로 괴이합니다…장군님.”

이여백은 태연한 기색으로 걸어가서 쓰러진 장군기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그녀를 돌아보며 차분히 웃었다. 그녀는 괴롭게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그녀에게 이여백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여름바람이 원래 흔적 없으니 기가 넘어간 것이 그닥 놀랄 일은 아니다.”

“그래…그냥 우연일거야.”

그녀는 나직히 되뇌였다. 늘 그러하듯 스스로를 달래어 보지만, 아무래도 염라대왕과의 대화가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서…왜 하필 눈앞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 허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이여백이 다시 담담히 웃어보였다.

“이젠 돌아가야지.”

뭔가 섬광 같은것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뭔가 말하려고 입을 달싹였지만 그녀는 곧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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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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