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오감독이 정말 시끄럽게 구는군. 넌 내가 지금 할일이 적은줄 아냐?”

노작가는 분노로 턱까지 부르르 떨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은을 쏘아보았다.

“B팀 맡은 놈은 성주 이씨 후손이랍시고 자료까지 들고 와서 대본이의 제기하지, 오감독은 또 너 같은 신인을 보내서 엔딩이 어쩌고 하지…대본 수정하면 또 올려서 심사를 다시 거쳐야 해. 요즘 심사기준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너 같은 신인작가들이 알기나 해? 이번 드라마가 초반부터 말썽이 많은 걸 너도 모르진 않을텐데?”
“하지만 보다 정확한 고증을 거쳐 역사 드라마를 만들자는 건 다들 똑 같은 마음이 아닐까요?”

서은의 또렷한 말에 노작가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서은을 노려보았다. 서은은 담담하게 눈을 들어 노작가의 시선을 마주했다. 사무실 공기가 한결 더 팽팽해졌고 바로 그때 보조작가로 되어보이는 젊은이가 문안으로 들어서면서 머리를 숙였다.

“선생님, 이PD님 전화입니다.”
“또 걔야? 일단 저쪽 서재로 연결시켜.”

노작가는 머리를 흔들더니 서은을 향해 한마디 내뱉었다.

“난 바쁘니까 돌아가서 대본 공부나 해라. 신인이면 신인답게 글 잘 쓸 생각이나 해야지 이미 나온 대본에 왈가왈부해서야 되겠냐? 앞으로 이런 일로 날 보자는 말을 하지 말아.”

노작가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무실을 나섰고 서은은 한참 멍해있다가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옆칸 서재에서 노작가가 언성 높여 통화하는 게 들렸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대본에 이성량에 대한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이PD 자꾸 이럴거야? 오감독 얼굴 봐서 내가 참는데 지금 촬영이나 잘 마무리 하라고. 그리고 자네 그래봤자 B팀이야! 오감독도 오케이한 대본인데 왜 엎으려 들어?”

자신 말고도 대본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있나 보다. 서은은 머리를 기웃하면서 노작가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연 몇일 굵은 장마비가 내렸다. 서은은 유리창에 부서지는 빗물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전 노작가와의 통화내용을 떠올리자 그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도대체 몇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이 대본 더 이상 수정 못해.”
“선생님, 부디 역사자료에 충실하고 제 의견을 참고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마에 피도 안마른 녀석이 어디다 건방지게! 네가 가져온 자료만 자료야? 나한테도 자료가 있어!”
“선생님, 저 역시 문학작품과 영화, 드라마는 예술이라 일정한 왜곡은 가능한 것쯤은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임의로 이렇게 고치시면…이여백은 만력에 의해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만력황제는 요동의 장군들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만력황제가 이여백보다 일년 먼저 죽습니다.”
“죽으면서 유지를 남겼다 왜?”
“굳이 유지를 남기면서까지 이여백을 제거할 명분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말에 좀 임팩트와 반전을 넣어볼려고…”

노작가의 목소리가 조금 숙어들고 있었다.

“임작가, 우리 한발씩만 타협하자. 촬영일정은 코앞에 닥쳐오는데 대본은 아직 심사도 못거쳤어.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당신 너무 그러지 마. 오감독 낙하산인 걸 다 아니까 적당히 타협 좀 하자.”
“타협…”

서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선생님 작품 많이 보았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애정을 보이지 않네요. 이번이 선생님 커리어에 영향을 끼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작가.”

노작가는 거의 이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당신 어쩌자는 거야.”
“죽이지 않고 가는 건 어떻습니까.”

노작가가 침묵했다. 서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뭐?”
“꼭 사람이 죽어야 합니까? 다른 드라마들처럼 그런 진부한 엔딩으로 가지 말고 만력황제의 죽음까지 가지 않는 겁니다. 나레이션 처리도 있잖습니까.”
“음…”
“제일 화려한 장면에서 완결이 나는 겁니다. 태정을 하기 직전까지 가도 되겠지요. 만력의 유년과 청년시기를 집중적으로 재조명 하자는 얘기입니다.”
“계속 얘기해봐.”
“장거정과 이태후, 척계광과 이성량, 그리고 해서까지 충분한 편폭이 나옵니다.”
“…”
“지금까지 선생님의 작품은 그 역사인물의 유년과 동년, 청장년시기를 다 거쳐 말년에까지 이르는 발전과 몰락의 과정을 모두 그리셨습니다. 이번에 한번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젊은 시청자층을 타겟으로 해서요.”
“짧고 굵게?”
“네.”
“너, 내 보조 해라.”

노작가의 말에 서은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왜? 독립으로 가고 싶은데 보조 하라니까 같잖다 이건가?”
“아닙니다.”

서은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재빠르게 대답했다.

“저 언제부터 사무실 나가면 될까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서은의 표정은 착잡했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마음의 빚을 갚지요. 니칸외란 성주님.”

……

대본이 거의 완성될 무렵에야 오감독과 조윤아,  그리고 서은의 아버지는 촬영일정을 끝내고 베이징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그동안 진이가 가끔씩 연락을 해왔고 서은은 그녀에게서 우사였던 진의사가 결혼하러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전해들을수 있었다.

“그럼 결혼 후 다시 오시겠네.”
“약혼녀가 북방 수토증이 있어서 못오셔. 이젠 그쪽에 아주 뿌리 내리기로 했나봐.”
“그럼 신경내과쪽은 진이 너가 담당이겠구나.”
“응, 그렇게 됐어.”
“승진 축하해.”
“고마워. 그런데 축하만 하지 말고 언제 병원 들려. 건강검진 좀 받자.”
“나 대본 회의 들어가야 해서 이만…”
“야, 임서은!”

진이의 고함소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서은은 서둘러 통화를 종료했다.

“야? 임서은? 이게 진짜…”

서은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피씩 웃었다.

“간뎅이가 아주 제대로 부었구나. 무슨 말을 하면 몸부터 떨던 애가 반평생 공주로 살더니 기고만장 작렬이네.”
“누가 기고만장 하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윤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서은은 식지를 입가에 가져다댔다. 윤아가 환하게 웃었다.

“걱정마. 노작가님 지금 서재에서 주무셔.”
“그러니까 깨우지 말라고. 연일 밤샘하셨어.”
“괜찮아. 저분이 저렇게 주무시면 누가 업어가도 몰라.”

윤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분이 날 어찌나 이뻐라 하시는지, 수양딸로 삼겠다 해서 겨우 물리쳤어.”
“그래? 나한테는 찬바람 쌩쌩 일더만.”

서은이 입을 삐쭉거렸다. 윤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잠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너…뭔가 모르게 달라졌는데.”
“내가 뭘.”
“어쩐지…생기 있어지고 에너지 넘쳐. 예전의 너같지 않아. 반년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은 거니.”
“글쎄…하는 일이 있어 그런가.”

서은은 눈앞의 산더미같은 대본 자료들을 윤아에게 가리켜보였다.

“배우 캐스팅 다 하기전에 이 업무 끝내야 해.”
“아직 만력황제 캐스팅이 안되었다면서.”
“응, 정 안되면 오디션 봐야 할거라고 하던데.”

서은의 대답에 윤아가 씨익 웃었다.

“내가 한사람 추천했어.”
“누군데?”

윤아가 입을 동그랗게 오무렸다. 서은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오감독?”
“빙고.”
“그런데 그분은 감독님이시잖아.”
“감독이 배우 겸할수 없다고 누가 그래? 게다가 오감독님 이번 촬영은 B팀 감독 위주로 갈 거라고 하시던데.”

서은은 얼마전 노작가의 통화 내용을 떠올리고 머리를 끄덕였다.

“B팀 감독…그 이PD라는 분?”
“맞어. 신인이긴 하지만 되게 날카롭다 하더라구. 오감독님이 2선으로 물러서는 건 처음 있는 일 아니야?”
“신인에게 기회를 주시는 거야.”
“어쨌든, 믿고 맡긴다는 얘기가 되니까.”

윤아는 말을 마치며 서은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역광으로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윤아는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수상해.”
“응?”
“되게…뭐랄까. 눈이 부셔. 아름다워.”
“반년 못봤더니 입에 꿀을 발랐나.”

서은은 웃으면서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윤아가 곁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폰을 나꿔챘다.

“아까부터 왜 자꾸 폰 들어다보고 있어? 대화에 집중도 안하고.”
“조윤아! 이리 줘.”
“얼씨구. 당황해하는 걸 보니 뭐가 있는데? 누구야? 우리 서은이 눈부시게 만든 능력자분이?”
“빨리 줘!”

윤아는 멀리 달아나면서 핸드폰을 들어다보았다. 그리고는 소리내여 읽었다.

“밥은 먹었어?”
“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여기 농특산물 보냈으니 받으면 냉동실에 넣어둬. 혼자 하느라 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가서 해줄께.”
“알았어요. 언제 오세요?”
“일이 마무리 되면.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조윤아!”

서은은 발을 굴렀고 윤아는 허리를 잡고 웃었다.

“임서은, 너 정말 보기보다 맹추구나. 이럴땐 보고싶어요 하고 받아치는 거지.”
“너 입 못다물어?”
“아니, 그게 왜? 보고싶다, 사랑한다, 왜 말을 못해? 왜 썸을 타지?”
“니가 뭘 안다고 그래?”

윤아는 그제야 서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거두어졌다.

“어머, 화났어?”
“…”
“미안해. 난 장난이었는데…이리 심각할 줄 몰랐어. 정말 미안해.”

서은은 말없이 앞으로 다가가 윤아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냈다. 그러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보고 윤아는 더 울상이 되었다.

“미안해. 내가 어떻게 하면 용서해줄 거니?”
“만일 말이야…”

서은이 입을 열자 윤아가 두손을 마주잡고 그녀를 보았다.

“난 그를 기억하는데, 그는 나를 전혀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해?”

겨우 이 말을 입밖으로 꺼냈을 뿐인데 단검 하나가 심장을 겨누고 날아온 것만 같았다. 윤아는 의아한 얼굴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자 주고받는 저분이야?”
“…”
“문자로 봐선 니가 단답형인데 비해 저분은 너한테 관심이 있어. 그거면 된 거 아닌가.”
“…”
“난 그렇게 복잡하게 가기 싫어. 그 사람이 널 알지 못한다 해서 널 사랑하지 않는 건가? 만일 애인이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너는 그 애인을 버릴 거야?”
“…”
“과거를 붙잡고 있는 건 바보짓이야. 우리한테 중요한 건 현재고 미래야. 난 그렇게 생각해.”

……

“…만일 애인이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너는 그 애인을 버릴 거야?”

윤아의 말이 귀전에서 맴돌고 있었고 서은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에 일어나서 대충 얼굴을 씻고 그녀는 노트북에 마주앉았다.

“세월은 항상 그 누군가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인내를 요구한다. 기나긴 인내의 시간을 지나왔지만 그 사람은 내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차츰 마른 고목처럼 시들어가고 죽어가고 있었다.

과연 이대로…그 사람을 잊어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고…너무 아파서, 미안해서 감히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임을…나는 잘 알고있다. 그 사람도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똑똑.

누군가가 그녀의 방문을 노크했다. 그녀는 노트북을 덮었다. 아버지가 쟁반에 케익 한조각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오늘 내 생일이야.”
“그러네요…”

서은은 달력을 쳐다보고 잠시 민망한 기색을 지었다.

“엄마가 실종된 후, 아버진 한번도 생일을 쇠지 않았었죠. 저도 챙겨드리지 못해 미안해요.”
“니가 언제 그런 경황이 있겠냐.”

아버지는 케익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희슥희슥한 머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버지.”
“응.”
“아버진 아직 기다리세요?”
“…”
“솔직히 그동안 인정하기 싫었을 뿐,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 다는 걸…저나 아버지나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잖아요.”
“네가 어떻게…”
“제가 어릴때 무술관에 들렸던 그 스님이…말씀하시는 걸 우연히 엿들었어요.”
“…”
“다만 다 이해하진 못했어요.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데, 제가 만날 기회는 있다고 하셨죠…제게 금기서화와 무예병법을 두루 다 가르친 것도 그 스님의 말씀때문이 아닌가요?”
“…”
“그런데 왜 그때 제가 배우의 길을 걷는 건 그토록 반대하셨는지요?”
“널…잃을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에 무연한 슬픔 같은 것이 언뜻 스쳐지나갔다.

“모든 게 내 욕심이었다. 날…이 애비를 용서하지 말거라. 그 사람이 널 만나면, 되돌아오고 싶어질 거라…그리 믿었었다. 그래서 너를 혹독하게 내몰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난 널 잃기 싫었다. 그래서 연극연기학과에 가는 것도, 배우가 되는 것도 다 막았었다. 하지만 운명은 피해갈수 없었고, 나는 하마터면 널 잃을번 했었지.”
“아버지…”
“그러니까 더이상 허무하게 기다리진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너밖에 없다. 내 딸아. 그러니 너는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더이상 혹독한 훈련따위는 없을 것이다. 너는 네가 하고싶은 걸 하고, 네가 가고싶은 길을 가면 그만이다.”
“그거 아세요?”

서은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가르치신 것들이, 제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도움이야 무슨.”
“그래서 이건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아버지.”

아버지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가가 젖어있었다. 그 옆모습이 하도 쓸쓸해보여 그녀는 가슴이 저렸다. 슬픔이 가득 배인 그 옆모습에서 왠지 모를 불안한 예감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그 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이틀후에 밝혀졌다.

그날도 저녁식사후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있는데 오래동안 법의 테두리밖에서 활동하던 한 조폭 단체가 경찰에 검거되었다는 뉴스가 티비에 나왔다. 폭력, 마약, 청부살인 등 범죄를 저질러온 그들이 대략 20년전부터 베이징 근교에서 활동한 것으로 드러난 내용이었고  경찰조사에서 밝혀진 피해자 명단이 중간글자 이니셜 처리로 공개되자 아버지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관련 사실을 확인한 아버지가 방문을 닫아건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

-선생님 요즘은 어때?
-그냥 그래요. 몇일째 끼니를 거르고 계셔요.
-상심이 크시겠다. 넌?
-저는…잘 모르겠어요.
-…
-제게는 정말 낯선 존재니까요. 엄마라는 존재는.
-그렇구나.
-아버지처럼은 아니지만 저도 슬프죠. 우울하고.
-알아.
-그러나 제겐 아버지가 더 중요해요. 빨리 추스리셨으면 좋겠어요.
-저, 그러니까…내가 소포 하나 보낼께.
-이번엔 뭐에요?”
-일찍 보냈으면 좋았을 것을. 나도 최근에야 알아서.
-뭔데 그리 신비스러워요?
-선생님께 드려. 그러면 추스리실 거야.
-그냥 드리기만 해요?
-응.
-언제 오세요?
-일 거의 마무리 했어.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서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 있다가 한참 지나서야 입속말로 말했다.

“보고싶어서요.”

그녀는 화뜰 놀랐다. 혼자였지만 행여 누가 듣지 않았을까 주위를 둘러보기까지 했다. 잠시 손등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힌 후 그녀가 중얼거렸다.

“미쳤어. 정말.”

문득 그녀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막힐 듯 짜릿한 통증이 심장을 스쳐지났기 때문이다.

“아아, 이건 그 사람이 슬퍼하는 거야.”

그녀의 기억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한마디.

“익수가 삼천이라도 난 그 한바가지만 취하겠다.”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다가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두드렸다. 그리고도 성차지 않아 다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정신 차려. 임서은…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너 이건, 엄연한 배신이야.”
“배신은 무슨. 그렇다고 돌아가지도 못할 과거에 억매어 살 거야?”
“그 사람을 생각해봐. 널 보내고 30여년동안 외롭게 버티던 그 사람을.”
“그래서 그 환생일수도 있잖아. 그렇게 닮은 사람이, 그처럼 자상하게 배려해주는 사람이 지금 있잖아.”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몰라. 내가 서안공주가 아닌 것처럼, 이시현도 그 사람이 아니잖아.”
“그걸 어떻게 단정짓지? 그가 전생에서 만난 그대가 아니라는 걸?”
“데자뷰…기시감 현상이 없어. 이시현에게는.”
“맹강탕을 마셔서 기억이 사라졌을수 있잖아.”

“그만!”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머리속을 휘젓던 생각들이 그바람에 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이대론 안되겠어.”

그녀는 서둘러 집문을 나섰다. 당장 사무실에 가서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마음이 심란했다.

……

이시현의 말대로 이틀후 소포가 도착했다.

모든 것이 그가 말한 대로였다.

두문불출하던 아버지가 방문을 연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얼굴 한가득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보았다.

“내가 몇일 집을 비워야겠다. 괜찮겠냐.”
“어딜 가시려구요?”
“급히 가볼데가 있어.”
“네, 다녀오세요.”

아버지가 집을 나선 후 이시현에게서 문자가 왔다.

-소포 받았지?
-네.
-뭐라 하셔?
-가볼데가 있다고 나가셨어요. 방안에 쭉 계시는 것보단, 시름이 놓이지만 왠지 석연치는 않네요.
-괜찮을 거야.
-도대체 무슨 영문이죠? 소포는 뭐에요?
-가서 얘기해줄께.
-언제 오세요?
-이틀뒤.

서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뭇가지 위에 위태롭게 앉아있던 새 한마리가 후드득 날아가고 있었고, 외롭게 남겨진 나뭇가지는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남은 미련처럼 찬바람에 가볍게 떨고 있었다.

“아직도 이틀.”

이틀뒤면 드라마제작관련 첫 미팅이자 대본리딩 일정이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들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살짝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일단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왠지 그에게는 그런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이틀동안, 그녀는 전에없는 실수들을 저질렀다. 노작가의 커피에 설탕을 다섯덩이나 넣는가 하면, 미팅때 필요한 자료들을 찾지 못해 다시 프린트로 한번 더 뽑아내군 했다. 그녀의 이례적인 모습에 미팅전날 저녁에 잠깐 만난 윤아마저 미간을 찌푸릴 정도였다.

“너 지금 한가지 요리만 먹고있어. 줄창.”
“아…”

서은이 수저를 놓자 윤아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뭐가 잘 안돼? 아버님 일때문에 그래?”
“아니.”
“그러면 문자 주고받는 그분과 싸웠어?”
“싸우긴.”
“뭐 하긴. 그렇게 어떻게 싸우냐. 뭐가 있어야 싸우지.”

윤아는 말하다 말고 그녀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됐어. 들어가봐. 내일 중요한 미팅이라면서.”

집으로 들어온 서은은 한참 멍하니 소파에 앉았다가 샤워실로 향했다. 거실을 가로질러 가다가 문득 아버지의 방에 빛이 보여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아버지가 돌아왔나 싶어서 방문을 열어보았지만 전등만 켜져있을뿐 방은 텅 비어있었다. 문을 닫으려던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그리고는 뭔가에 홀린 듯 그녀가 앞으로 몇걸음 다가섰다.

“이건…”

이시현이 보낸 소포였다. 아버지 앞으로 보내져서 아버지가 직접 개봉했을 것이고, 그 안의 내용물때문에 아버지는 집을 나섰을 것이다. 그동안 참을수 없을 정도로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녀는 그가 와서 자초지종을 얘기해줄 거라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그 궁금증을 해결할수 있는 키가 보이자 그녀는 더이상 참을수 없었다. 그녀는 쭈크리고 앉아서 천천히 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이미 개봉한 편지 한장이 들어있었다.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녀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 뭐지? 이 이상한 편지를 보낸 사람은. 왜 이렇게도 필체가 눈에 익을까. 그녀는 급히 바닥에 주저앉아 편지를 아래로 읽어내려갔다.

……

“임작가, 미팅 준비는 다 됐지?”

노작가가 서은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제야 그녀는 펄쩍 정신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준비 다되었습니다.”
“긴장했구먼. 그리 떨 건 없네. 배우들과 B팀  이PD 빼고는 자네도 다 아는 사람들인데 무슨.”

노작가가 피씩 웃으며 앞장서 나간다. 그녀는 머리를 수굿하고 따라나섰다. 회의실은 이미 배우들과 스탭들이 모여 인사를 주고받느라 법석댔다. 노작가가 나타나자 다들 길을 틔워주었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배정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서은씨, 잘 부탁드려요.”

오주명의 경쾌한 목소리가 머리위에서 울렸다. 서은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제가 무슨…감독님이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고생했다는 얘기 들었어요. 서은씨 아니면 작가감독 트러블 만만치 않았을텐데…”
“어흠…”

노작가가 헛기침을 하자 오주명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이쿠, 어르신님도 계셨군요.”
“날 들으라고 하는 소린 줄 잘 알고있네만.”
“그럴리가요.”
“아무리 봐도 오감독은 전생에 나랑 무슨 원수를 진 게 분명해. 묘하게 날 싫어한단 말이야.”
“제가요? 어르신님을요?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서은은 그들의 대화를 뒤로 하고 조용한 구석쪽으로 다가갔다. 핸드폰을 들어다보았지만 여전히 잠잠하다. 채팅창에는 그녀의 대화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어제부터 연락이 안되네요. 문자 보시면 연락주세요.

“그나저나 이PD는 왜 아직 얼굴도 안내미나? 자네도 이리 일찍 오는데 거 신인 PD가 너무한 게 아닌가?”
“어르신, 이시현PD가 신인은 아닙니다. 이자현배우가 애초에 누구때문에 떴는데요?”

노작가와 오주명의 대화가 그녀의 귀에 꽂혔다. 이시현? 대본수정을 누차 요구하던 그 이PD가?

“그래도 자네에 비하면 애숭이지. 그리고 대본에 대해 얼마나 시끄럽게 구는지…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대본을 수정한 적이 없었네.”
“아, 그러셨어요?”
“아마 전생에 자네보다 더 원수였던 모양이야.”

그녀는 가만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심장이 방망이질 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이시현…그는 대체…

“서은씨.”

뒤에서 오주명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황급히 돌아섰다.

“감독님, 저 잠깐 자료 가지러…”
“이시현씨 연락 됩니까?”
“네?”
“어제부터 연락이 안되네요. 선배님께 들었습니다. 서은씨랑 지난 몇달 가까이 지내던 사이라구요. 혹시 연락 되는지 확인해보실수 있습니까.”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항상 그녀의 문자에 빠르게 대답을 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제부터 전혀 답장이 없어 그녀도 불안하던 차였다.

“제가 다시 연락해볼께요.”
“네, 미팅시간 늦어도 되니 최대한 연락 부탁드립니다. 약속 칼같이 지키고 이런적이 한번도 없는데…”

몸을 돌리던 오주명이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의문어린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나요? 얼굴이 왠지…슬퍼보여서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요."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회의실을 걸어나왔다. 어제밤 이후로 그녀는 제대로 정신을 수습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사고가 나기전 그녀가 찾아왔던 오감독의 그 사무실이었다. 1층에 내려와서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물어봤지만 이시현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창밖에는 늦가을 낙엽이 지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마지막 잎새 하나가 바람에 애처롭게 떨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나직히 한숨을 내쉰 후 핸드폰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문득 그녀가 핸드폰을 귀가에서 내리고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틀리지 않았는데, 신호음이 분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어제부터 전혀 연결되지 않는 번호가 의외로 정상으로 통하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여보세요.”

그의 숨소리가 약간 거칠게 느껴지는 건 그녀의 착각일까. 핸드폰을 쥔 손에서 선득한 물기가 느껴졌다.

“저…저에요.”
“알아.”
“오감독님이…연락해보라 해서요.”
“그래. 오감독님 아니면 나한테 전화 한통 안할 생각이었나.”

농담처럼 들리긴 했지만 농담이 아닌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몰아쉬었다. 가을햇빛은 화사했고, 정문에서는 한 아이가 햇빛속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어디세요?”
“사무실 가고있어. 일이 있어서 좀 늦어졌어. 연락도 그래서 못받았고. 만나서 얘기할께.”
“제가…정문에서 기다릴께요.”
“추운데 올라가있어. 곧 도착할테니.”
“괜찮아요. 같이 올라가죠.”

그녀의 고집스러운 말투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문자 금방 확인했는데…무슨 일 있어?”
“만나서 얘기해요.”
“그래. 정문 거의 왔어.”
“알았어요. 저도 나갈께요.”

그녀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들었다. 정문과 마주한 길 건너편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녀의 입귀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가 막 정문을 나서는 순간.

그녀의 시선이 정문앞의 횡단보도에 가 닿았다. 노란 나무잎이 길위에 사뿐히 내려앉고 있었고 정문에서 놀던 아이가 그것을 잡으려고 몇걸음 앞으로 내달렸다.

“조심…”

그녀는 몸을 날려 아이의 앞을 막았다. 다만 오래동안 경공을 쓰지 않은 몸이 전보다 유연하지 못한 탓에 아이의 몸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신호등은 바뀌지 않았고 차들은 쏜살같이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삽시간에 그녀를 밀쳐내는 그 어떤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그 힘에 의해 옆으로 밀려난 순간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안돼…!!!"

붕 하고 그의 몸이 공중으로 떴다. 그녀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소리도 낼수 없었다. 허공에 떴던 그의 몸이 차위로 추락하고, 그의 입가에 흐르는 한줄기 붉은 피를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도로 중앙의 그를 향해 다가갔다. 길 저편에 있던 그는 대체 어떻게 이쪽으로 온 걸까. 불가사이했다. 하지만 불가사이에 앞서 억장이 무너졌다. 놀란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부모에게로 달려갔고 그는 그녀를 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이 상황에, 이 상황에 어찌 웃음이 나온단 말인가.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울컥 하고 눈물이 솓구쳤다. 그 언젠가, 분명 이 도로위에서…그녀는 형언할수 없은 깊은 슬픔을 느꼈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일을 예상한 그녀의 데자뷰였을까.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아마 하늘의 뜻인가봐."
“네?”

그는 시선을 들어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깊이 응시했다.

“이제야 알겠어.”
“뭘…요?”

뜨거운 것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자상한 행동에 그녀는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그의 손길에 뭔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그녀의 심장을 짜릿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이게 이생에서의…내 사명이라는 걸."
"어떻게 그걸…"

그녀는 놀란 눈을 들었다. 눈물어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이 세상 사람같지 않은 그의 절륜한 얼굴과, 그의 입가에 머금은 깊이를 알수 없는 담담한 미소였다.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여러번, 아주 여러번 애쓴 뒤에야 그녀는 목소리가 나갔다.

“맞죠?…”
“…”
“당신이 맞죠?”
“…”
“어제부터 몇번이나 연락했어요. 물어보고 싶어서요. 그 편지, 어디서 났어요? 그건 그때 내 행장에 있던 서신이었어요…필체가. 바로 이태후마마께서 전해주라던…”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드디어 왈칵 눈물을 쏟았다.

“맞죠? 당신이 맞죠? 어찌하여 나처럼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그러면서 말을 못하고 있었던 거…맞죠?”
“…기억하고…있었네. 그렇게 여러 단서를 보였지만, 모르는거 같아서 체념했었는데.”
“네, 잊은척 하고있었어요. 당신이 그걸 원했기에, 그리고 제 주위 사람들도 그걸 원했기에…당신도 나처럼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걸 알았다면, 미리 알았다면…”
“임서은.”

그가 나직히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그의 눈빛이 오롯이 그녀의 가슴속에 들어왔다. 그동안 꾸민 듯 밝은 모습 뒤에, 얼마나 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그의 눈빛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연한 공허가 섞인 눈빛이였고 그속에는 순정과 슬픔, 그리고 지독한 고독 같은 것이 어려있었다. 또한 그 눈빛에는 아득한 기억 저편의 요동의 삭막한 전쟁터와, 그녀가 없는 오랜 세월을 버텨온 한 무구한 영혼의 회한이 내비쳤다.

그…였다. 그가 분명했다. 이 익숙한 눈빛, 고아하고 담정한 분위기…그런데도 그를 몰라보았다니…어쩌면 데자뷰-기시감이 없는 건 그가 아니라 그녀였던 것을.

“미안해요…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해서…”

눈물을 쏟으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를 안았다. 그의 입가에서 울컥 하고 피가 솟구쳐 나왔다.

“병원…가요. 당신 죽으면 안돼.”
“헛수고…하지 마.”
“…”
“내가 그때 말했었지. 사라지더라도 단서를 달라고. 하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남긴 게 없더라구. 그러다가 당신이 남긴 행장에서 매화가 수놓인 손수건과 서찰을…발견했어.”
“…”
“날 위해 맞은 화살, 이런 식으로나마 돌려주게 되어서…다행이다.”
“안돼요..”
“생명은, 우리 소관이 아니야…당신이 말했었잖아.”
“하지만 명부의 소관도 아니죠.”

그녀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녀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저 이대로, 이대로 당신 못보내요. 어떻게 만났는데, 어떻게 기다려왔는데 또 헤어져야 하다니…나한테 너무한 게 아니에요? 엄마도, 우리 아이도 속절없이 보내버렸어요. 이번엔 당신인가요?"
“…”
“구급차 부를께요. 지금은 아무 얘기 하지 마세요. 나중에, 나중에 우리 다시 얘기해요.”

그녀는 그의 반듯한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차거운 바람이 낙엽을 휩쓸며 불어오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지금 이 자리의 그 슬픔이, 대체 무엇때문인지 그녀는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해요, 당신…나 이번엔 절대 당신 안보내.”

그녀가 중얼거렸다. 얼핏 고개를 들어보니 울음을 그친 아이가 노란 단풍잎 하나를 움켜쥔 채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이럴수 없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서은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에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 사망시간을 알리는 의사의 침울한 목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눈앞에서 그의 산소마크가 제거되고 있는게 보였다.

“이 사람…아직 안 죽었어요. 아니, 안 죽어요! 누가 죽는다 그래요? 당신들이 뭘 알아? 당신들이 어떻게 안다고 그래?”

그녀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앞으로 다가가 깊이 잠들어 있는 그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이봐요, 눈 떠봐요…이럴수 없어요…어떻게 당신 기다려왔는데, 어떻게 우리가 이 시간들을 견뎌왔는데…너무해요…이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서은아…그러지 마…”

곁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그 손을 뿌리쳤다.

“이럴 수 없어…돌려놔…모든걸 돌려놔줘.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내가 이제 더이상 뭘 포기하면 되는 건데?”

“서은아…”
“염라대왕…내가 졌어요…내가 무모했어요…지옥에 가라면 가고, 18층 고초를 겪으라면 겪겠어요…당신이 말하지 말라면 함구하고, 당신 시키는대로 다 움직일테니 이 사람 돌려줘요…제발…”

그녀는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차라리 까무룩 정신을 잃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멍한 눈길이 그의 얼굴을 더듬는다. 절망으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듯 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실안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잠시후 그녀는 다시 머리를 숙여 여전히 평온한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제야 어렴풋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각난 모양으로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잠깐만 기다려요…혼자 외롭지 않게 할테니까.”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뒤따른 그녀의 돌발행동에 순간 병실안에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들을 아득하게 뒤로 한채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왔다.

“다 끝났어요…이제 우리…절대 헤어지지 말아요…”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그의 손을 스치며 천천히 흘러내려 시트를 적셨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와 함께.

……

한달후.

서은은 눈처럼 하얀 웨딩드레스차림으로 아버지의 팔을 낀 채 천천히 식장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절륜한 모습의 이시현이 몸을 돌려 그들을 주시했다. 서은은 고개를 머리를  숙이고 홀린 듯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반생을 아끼던 딸인데…오늘은 사명을 완성한 기분이 드는구나. 행복하거라.”
“네, 아버님.”

이시현은 진중한 태도로 머리를 깊숙히 숙여보였다.

“앞으로는 아들로서…효도를 다하겠습니다.”
“사위도 반자식이니, 아들로 쳐도 되구말구.”

이시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아버지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윤아가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면서 한마디 께꼈다.

“저도 있어요. 아버님…이제부턴 저도 딸로 생각해주세요.”
“그건 안돼.”

서은이 옆에서 쐐기를 박았고 윤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은을 주시했다.

“왜 안된다는 거야.”
“곧 정씨 집안에 시집갈거면서 임씨가 되겠다고?”

서은이 하객이 모인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윤아도 웃으면서 하객들중에 끼어있는 정우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정우진의 근엄한 얼굴에도 약간의 웃음기가 어렸다. 이시현은 그것을 보자 얼굴을 흐리며 서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정우진은 안불렀는데.”
“본인이 오고싶다고 하는 걸 어떡해요.”

서은이 방긋 웃자 이시현은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서은의 손을 잡았다.

“이런 기쁜 날까지 누르하치를 봐야 하다니.”
“저들은 기억도 못하잖아요.”
“알았어. 투덜대서 미안해.”
“몸은 어때요? 머리가 아프거나 어디 불편하거나 그런덴 없죠?”
“괜찮아.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말아.”
“다행이 당신 건곤대나이 보법때문에 치명적인 충격을 비껴간 것 같아요. 어레스트가 오고 혼수상태가 오래 가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자해를 하면 어떡하냐. 나더러 생을 허타이 굴지 말라면서 정작 당신은…다음생에 하마터면 못만날뻔했잖아.”
“저 윤아가 정말…”
“말 돌리지 말아. 앞으로 한번만 더 그랬다간…”
“어쩔 건데요?”

그녀가 아름답게 웃자 그의 시선이 금세 뜨거워졌다.

“평생 널 모르는 척 할수가 있어.”
“미안해요. 그날 당신이 깨어나지 않는줄로만 알고 그만…”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비치는 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다. 날씨가 추워오긴 했지만 야외에서 진행하는 스몰웨딩을 선택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어떻게 이 밝은 햇빛을, 싱그러운 바람을, 생의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겠는가.

“왜 봄에 결혼하자는데 반대했어요?”
“이젠 기다리는 덴 질색이어서 말이지.”
“그래도 몸이 완쾌된 다음에…”
“왜? 첫날밤이 걱정인가.”

그의 웃음 섞인 말에 그녀가 눈을 살짝 흘겼다.

“당신답지 않게 짓꿎어졌어. 그전처럼 점잖게 행동할수 없겠어요.”
“어흠…이리 오시오, 부인.”
“…”
“어디 보자, 과연 꽃같고 옥같소.”
“참…”

서은은 피씩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정우진이 그들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이시현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런데 당신 결말 말이에요.”
“…”
“어떻게 된 거에요? 역사 기재는 바뀌지 않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여기로 올수 있었죠? 이건 명부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나요?”
“그날밤, 누르하치가…이겼어.”

이시현의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건곤대나이 보법이 있는데도요?”
“그래서 난 밀폐된 공간을 택했지.”
“…”
“그리고 내 검으로 누르하치를 공격했다.”
“…”
“죽기를 겁내지 않는 쪽과 죽기를 겁내는 쪽,  어느쪽이 이길 것 같냐.”
“절박한 쪽이요.”
“맞아. 그토록 절박하게 죽기를 바랐는데, 절박하게 살기를 바라는 누르하치에게 졌을줄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당신이 이겼죠.”

그녀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의 의연한 얼굴을 마주했다.

“당신은 누르하치가 절박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용했어요. 그는 절대 당신 손에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계획한 것이 아닌가요.”
“쉿. 염라대왕이 알면 큰일나지.”

그가 가볍게 속삭였다. 그녀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명부에선 이미 알았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당신에게 이번 액운이 떨어진 게 아닐까요.”
“그런가.”
“지금까지 명부를 우롱한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
“됐어요. 생각 안할 거에요. 지금의 나로서는…당신을 다시 만났다는 것이 꿈만 같으니까요. 이거 정말…꿈 아닌 거죠? 우리…다시 만난 거 맞아요? 나 더 이상…당신과 당신 전생에게 동시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는 대답대신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예측된 결과보다 미지의 세상을 소망했던 그의 옛일이 떠올라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누구에게나 생은 소중한 것이고 미지의 삶은 예측할수 없어 더욱 아름답다. 예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번다한 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흩어지자 그들은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철령이었다. 그녀가 알고싶어 하는 것들은 그가 철령에 도착하면 죄다 알려주기로 했다. 밤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항에서 그녀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다녀올께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내가 왜 널 걱정하겠냐. 바통 넘겨줬는데.”
“아버지도 참…”

그녀가 웃자 아버지는 진지하게 말했다.

“잘 다녀와. 그리고…고맙다.”
“뭐가요?”
“그냥…너라는 존재 자체가.”
“…”
“다녀오거라. 이제 너의 액운은 끝났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그냥 그런 게 있다. 잘 다녀와.”

석연하게 말을 남기며 아버지가 통화를 종료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웃했다. 출발시간이 한참 남아있어서 그녀는 가지고 다니는 노트를 꺼내들었다. 대본을 쓸때 가끔 정리했던 필기들이었다.

-우리의 태여남은, 생각하고 이해하고 사랑할수 있는 기회의 약속이라고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의 기적을 만들어가는 일이라고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이 약속을 지켜 가는 과정이다. 어둡고 무서운 이 세상에 사랑이라는 빛을 만들어 생과의 약속을 지켜 가는 그런 과정 말이다.

바람 부는 세상, 청량한 늦가을밤, 이 글을 마무리 할즈음, 나는 어쩌면 전생과 부활에 관한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차거운 달빛과 영롱한 별빛아래, 나뭇가지위의 모든 잎새가 바람에 스쳐 아름답게 떨릴 때…

나는 그저…오래동안 시간과 운명을 상대하여 고통스러운 싸움을 경험한 누군가의 인생을 기록한 이 이야기를 통해, 현대의 휘황찬란한 물질문명에 매혹되어 역사를 왜곡하고 진정한 사랑을 잊고 사는 병든 우리가, 자신의 있을 곳과 걸어갈 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할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고요하게 살아있는 수천만의 모든 생물들, 그들의 꿈…삶의 지혜들…몇백년전의 침묵의 그 시간속으로…이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꿈을 향해…그리고 진실을 향해…

이 글을 마치면서 누군가 내 글의 미소한 존재로 인해 이 땅에서 열정과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토록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몸부림을 쳤던 그 슬픈 년대를 되새기고 기억해준다면, 그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게 해준, 역사의 기록에 의해 사장된 수많은 익명의 존재들에게 머리 숙여 경의를 표시한다.

눈앞에 훤칠한 실루엣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노트를 접고 고개를 들어 눈을 반달처럼 휘면서 웃었다. 그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마주친 둘의 시선속에서 별빛이 흐르고 있었고  순간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주위의 세상이 고요해졌다.

같은 시각 서은의 자리 앞에 앉아있던 한 할머니가 그들을 돌아보더니 조용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할머니의 눈에서는 예지의 빛 같은 것이 스쳐지나고 있었고 할머니는 그런 초연한 미소를 얼굴에 담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들을 뒤로 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밤하늘의 희미한 별빛들은 세상의 무수한 이야기들을 깜빡이는 듯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고 북쪽하늘에는 새로운 생을 기약하는 북두성이 이 땅을 향해 눈부시게 밝은 빛을 내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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