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1장을 읽고 생긴 기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장을 읽었을 때, 나는 어떤 내면의 명징함 같은 것을 느꼈다. 인간 정신이 ‘낙타’에서 ‘사자’를 지나 ‘어린아이’로 변모해 가는 과정은 내 일상에도 적용 가능한 해석의 틀을 주었고, 나는 내 삶의 반복적인 행위들조차 창조로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밥을 짓는 일, 아이와 나누는 대화, 가족을 위한 수고조차 ‘놀이’로 읽히는 순간, 내 삶은 의무의 연속이 아닌 창조의 장이 되었다. 철학은 그렇게 나의 일상에 스며들었고, 삶을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보게 했다.

그래서 더 기대했다. 2장의 제목은 『덕에 관한 강좌에 대하여』이다. 덕에 대해 말한다니, 당연히 삶의 방향에 관한 진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2. 그런데 웬 ‘잠’?

그런데 막상 책장을 넘겨 읽기 시작하니, 어딘가 이상했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단어는 ‘덕’이 아니라 ‘잠’이었다.

“잠에 대한 경의와 잠 앞에서의 조심스러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 잠을 잘 못 이루며 밤에 깨어있는 자 모두를 멀리하라!”
“잠을 잔다는 것, 이건 결코 하찮은 기술이 아니다. 종일 깨어 있으려면 필요하니 말이다.”
“도둑조차도 잠 앞에서는 조심한다. (생략)”

지금 이게 ‘덕’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잠’에 대한 강의인가.
처음 읽을 때는 몹시 헷갈렸다. 두 번째는 당혹스러웠고, 세 번째 읽을 때는 어쩌면 이것이 니체의 의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이 텍스트에서 ‘잠’은 ‘덕’보다 훨씬 자주 등장한다. 언어는 사용 빈도에 따라 의미의 중심이 재배열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장의 핵심 주제는 실제로는 ‘덕’이 아니라 ‘잠’처럼 읽힌다. 제목과 본문이 일치하지 않는 이 간극은, 호의적으로 읽자면, 니체의 의도적 장치이다. 그는 독자의 예상을 비틀고, 전통적 도덕 담론에 질문을 던진다.

‘덕’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정작 ‘잠’ 이야기를 반복하는 이 텍스트는, 독자인 내 기대를 흔들고, 이해하려면 여러 번 곱씹어 읽게 만든다. 마치 ‘덕’에 대한 강의를 기대하며 온 이에게 수면제부터 건네는 것처럼, 니체는 ‘도덕적 인간’이라는 이상에 의문을 던진다. 물론, 이것이 단순한 기만이 아니라 철학적 전복의 수사 장치라고들 하겠지만, 나는 감히 묻고 싶다. 니체의 이런 혼란스러운 글쓰기가 과연 최선일까?

3. 주석의 힘이 필요한 텍스트

각주를 통해서야 비로소 이 장의 구조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장은 플라톤의 『국가』(폴리테이아)에서 말하는 “조화로운 영혼 상태”― 이성이 감정을 잘 조절하고 욕망을 다스리는 상태 ― 를 니체식으로 풍자한 것이었다.

“비판의 매개체인 ‘잠과 덕’은 플라톤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건전하고 절제있게 처신하고, 그 사람이 잠이 들 때는, 이성적 부분을 깨워 대접을 잘 받게 하고 (…) 욕구적인 부분도 잘 조절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잠들게 하고 (…) 격정적인 부분도 진정시켜 격앙된 상태에서 잠들지 않도록 하네 (…) 그런 상태에서 진리를 가장 잘 파악하게 될 것이네”(『국가』(폴리테이아) 571e ~ 572a).

플라톤은 그렇게 조화로운 자만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니체는 그 구도를 가져와, 덕이 있는 사람은 잘 자고,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의 말투는 어딘지 진지하지 않다. 어조는 교묘하고, 비웃음이 섞여 있다.

4. 니체와 성경의 조우

나는 이 장의 많은 대목에서 성경을 떠올렸다.

“신과도 화평하고 이웃과도 화평하라… 이웃의 악마와도 화평하라.”
“자신의 양을 가장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는 자를 나는 항상 최고의 목자라고 부른다.” 
“나는 정신이 가난한 자들이 무척 마음에 든다.” …

이런 표현들에서 성경 구절을 떠올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울 것이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4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1-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 5:3)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는 전통적인 ‘덕’의 교과서인 성경을 풍자하고 있다. ‘잠’에 집중하는 이들이, 자신의 욕망과 본능을 마비시키며 스스로를 윤리적으로 ‘평화로운 사람’이라 여기는 도덕체계, 그 체계를 니체는 비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덕’이 정말 그렇게 조롱할 일인가?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가장 창조적인 실천이 아닐까?

니체가 말한 ‘놀이’, ‘새로운 가치의 창조’는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자신의 기준을 세우는 행위이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윤리야말로, 인간 본능(‘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가장 반하는 초월적 요구이다.

그것은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창조 행위에 가깝다. 본능을 넘어서 관계를 새롭게 쓰는 일, 해석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 폭력 대신 용서를 택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사자 정신과 어린아이의 놀이가 아닐까.

5. 에필로그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덕’을 대체로 받아들인다. 온유함, 자비, 절제와 같은 가치들은 인간 관계와 공동체를 살리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다만, 그것이 삶의 구체적인 순간마다 자동으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해석과 질문, 내적 씨름이 필요하다. 니체를 읽으면서 점차 느끼는 것은, 덕이란 고정된 정답이 아니라, 나의 신념을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끝없는 모색이라는 점이다.

과연 그런가? 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불확실함 속에서도 성찰을 이어가는 태도가, 덕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최근 특히 양질의 ‘잠’에 대한 고민이 늘었다. 좋아하는 커피마저 끊어야 하나 고민하고, 언제 잠들지, 이부자리는 무엇으로 바꿀지… 일일이 신경을 쓴다. 니체의 책에서처럼 메타포가 아닌 사전 의미 그대로의 ‘잠’을 매일 고민하는 사람이다. 이 글을 쓰던 어젯밤도 니체의 덕과 잠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은 채, 뒤척였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삶을 바꾸지는 않지만, 삶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 나는 이제 이 혼란스러운 2장을 넘기며 3장을 기대한다. 덕도 덕이지만, 다리를 뻗고 단잠을 자고 싶은 마음으로.

1장 후기: [니체 사적 독해①] 엄마 역할, 놀이가 되다 https://wulinamu.com/wlnm/4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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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각보다 글이라는 것도 잠처럼 참 쉽지 않네요. 글을 올리고 나서 몇몇 문장을 고치고, 논리도 다시 조율했습니다. 조회수 19회 이전까지 이미 읽으신 열아홉 분께는 송구한 마음과 함께, 혹 다시 한번 들여다봐 주시길 권합니다. 덕이란 결국, 고쳐 가는 여정일지도 모르니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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