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도문시 량수진은 동쪽으로는 훈춘시 밀강향<密江鄕>과 이웃하고 서쪽은 

 문시 <圖們市>와 이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왕청현<汪淸縣>과 이웃하고 있는

        교통 요충지 이다.  량수진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함경북도 온성군과 마주하고 있다.

량수진의 거리의 모습남쪽에 보이는 산은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에 있는 산들이다.

량수진의 총면적은 371평방킬로메터 이고 12개의 행정촌과 1개의 사회구역이 있다

 구는 14천여명이다. 80년대까지는 인구의 대부분이 조선족이 였다그러나 최근년에는

 조선족 인구의 급감과 함께 한족인구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지금 량수진에 인구는

 절반가량 감소되였다 고도 한다상주인구는 6천명 정도밖에 안된다고 한다조선족들이

 고향을 많이 떠나다 보니 인구가 급감 된것 이다량수유기 입쌀은  명성을 전국에 떨쳤으

 석탄삼림석재  자원도 풍부한 고장이다.

훈춘에서 량수로 들어 오는 입구에 있는 도로표지판량수로 부터 훈춘시 까지는 41

 로가 되고 도문까지는 21킬로의 거리며 왕청현과는45킬로가 되는 거리다.  3개 현시의

삼각 교차점에 위치한 량수진은 역사상 왕청현에 속하다가 훈춘현에 귀속 되였으며 1991

7월 부터는 훈춘시로 부터 도문시로 넘어 갔다옛날에 왕천현 관할에 속해 있을 때는

왕청현 춘방구라고 불렀고 그후 량수천자라고 불려지다가 량수로 간략되게 그 지명이

불려지고 있다.

도문으로 부터 량수진 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과수원다리다리 넘어 산고개는 량수사

 람들이 예전에는 치부장 고개라고 부르는 산 고개이다.

량수진 서쪽 주택구역아담한 단층집들이 줄지어져 있다.

량수진 철북구역 <오지공장구역> .  훈춘으로 통하는 철로가 량수진의 중간을 지나면서

철남철북이라고 부른다.

예전의 흥성함은 옛말이  양고기 산적점 거리

량수진 중학교의 서쪽 골목길

무더운 여름 집마당 그늘에서 화투를 놀고 있는 할머니들

량수 시장 <市場>.  장사군은  한족들이 많다.

찰떡만두기 라고 쓴 상자가 보인다우리 전통음식을 파는 조선족 아주마들이 

  명 있다언제까지 우리 전통음식이 시장가에 보일지?

작년부터 거리를 달린다는 한족 나그네의 당나귀차

천여명의 학생이 학교가 모자랄 정도로 운집해 있던 조선족 학교지금은 학생

 수가 백명도 되나마나 하다고 한다.  올해 3월부터는 조선족 학교와 한족 학교

 가 합병한다고 한다농촌에서의 민족교육은 암담하기만 하다.

주민 주택구 뒤에 보이는 붉은 기와를 얹은 중학교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량수중학에는 천여명의 학생에 초중과 고중이 모두 있었다그러나 지금

  은 조선족 중학과 한족 중학교를 합병했지만 2백명 좌우의 학생뿐이다.

점심 시간에 집으로 향하는 조선족 중학생들

길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조선족 아이올해에 조선족 소학교에 붙었

 다고 한다.

량수진의 옛 서점앞 거리

 량수향 <凉水鄕 > 정부 청사

70-80년대까지 호황을 이루던 량수공소사합작사 백화점지금은 계획경제 시대

 의 흥성함은 사라지고 어느  개인이 도급 맡아서 농업생산 자료를 판매하고 

 을 뿐이다.

량수진에서 하동촌 <룡호촌>으로 가는 

량수진 옛 복리상점앞  거리들

량수진 량수촌이 위치한  구역그 당시에는  흙길이 였다.

량수진 량수촌의  골목길

예전에는 흥성흥성하던 중학교와 영화관공소합작사를 가던 길이 그때는 

초가 무성했다.

중학교 언덕밑에 있는 과수원집  한옥과 초가집들

초가집이 보이는 량수촌 풍경

량수진 공소사 , 중하교 , 학림촌으로 가는   골목길 

내가 중학교를 다닐적에 이 길을 얼마나 다녔는지 모른다. 그 당시에는 정답기 보다는

스산했다.

량수진 량수촌 12조가 위치한 구역어제 날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나는  마을에서 태여나서 동년을 보냈다.

지금도 옛날 그대로인 내가 동년을 보내던 골목길조선족 거주민은 얼마되지 

 않고 모두 한족들과 몽고족들이 이주해 살고 있다.

골목길 하나하나가 추억을 만든다.

살아진지 오래 되리라 생각했던 작은 골목길이 그 당시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학시절 벼모 방학때  작은 골목에  뻗어 있던 살구나무에 퍼런 살구를 

 쳐먹던 기억이 떨올라 웃음이 나온다그때는 퍼런 살구도 맛나게 먹었다.

고향집 부근의 작은 골목길들이 깊은 사색을 만든다.

어제날에 비오는 날에는  장화없이는 다니지 못하던 고향길이 지금도 장화없이는 …

 골목길에서 자란 기억이 어제 같은데  추억으로 몇십년이 철없이 지나갔다.

흘러간 세월의 년륜이  골목길에 박혀있는것 같다.

고향이라 좋은 것만은 아니다민망스럽기도 하다그 모습들이 어제 보다

도 루추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으니 말이다.

매일같이 놀러다니던 친구집이 있던 골목길지금은 친구집은 허물어져 없었다.

어제날 보다도 파손이 심한  골목길들누구 하나 관할하는 사람도 있는것 

 않았다.

찌그러 질대로 찌그러진 초가에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들려오는 말소리

 가 우리말이 아닐뿐이다.

고향 량수촌의  초가집 마을 구역

내가 학생 시절을 보내던 고향집돌아 가신 부모님들 생각이 난다우리 집 부터

조선 국경까지는 500메터의 거리 였다청계하를 사이에 두고 조선 땅이다.

호박농사가 풍년인 모양이다팔십이 넘는 할머니가 우두커니 앉아서 가을 

 빛을 쪼이고 있다.

김대룡 할아버지량수진에서 년장자로서 올해 나이 95살이라고 한다.지금도 

 소도 길으고 마당일도 하며 호박농사도 짓고 있다.치매를 앓는 <위사진

  로인을 돌보면서 살아가고 있다.귀가 멀쩡해 그렇히 건강한 모습이다량수

  는 산 좋고  좋은 고장이라서 그런지 장수로인들이 많다.

량수에도  한옥들이 몇채 남아 있다이집은 이태전에 한족에게 팔렸다고 한다.

김대룡 할아버지가 살던 한옥집에 있는 해가 떠오르는 문양

량수진 경로원작년부터 3층집  경로원을  짓고 있다로령화 사회가 

 리 사회에도 찾아왔다.

량수진 조선족 기독교회

량수진 한족 기독교회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있는 조선족 농부들

량수진 하서촌 4조의 농민들이 벼모를 박고 있다.

량수진 정암촌은 한국 충청북도 이주민들이 두만강을 넘어 삶의 터전을 잡은

충청북도 마을이다몇해전에 고향에 다녀 왔다는 정암촌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량수진 정암촌의 부녀들이 농악무를 즐기고 있다.

량수진에는 오지공장이 있다예전에는 동북3성의 김장독과 쌀독굴뚝등을

모두  공장에서 공급하다 싶이 했다지금은 흑룡강에서  공씨성의 한족

사장이 도급맡고 굴뚝용 오지관과 오지 기와만을 생산하고 있다.

량수에는 석탄자원이 풍부하다작은 탄광들은 모두 페쇠되고 지금은 연변

 량수탄광만이 남아있다량수 탄광이 생겨나면서 량수에는 한족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량수진 경영촌 서남쪽으로 부터 흘러오는 두만강두만강 너머는 조선에 산이다.

두만강 물을 끌어올리는 양수기가  보이는 조선에 땅

량수진 경영촌의 앞을 지나 두만강은 전설이 남아 있는 쿨룽산을 에돌아 흘러

고 있다량수로 부터 두만강 하류 라고 한다.

 <룡호>석각의 서쪽 멀지않은 곳에 있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거북산

량수진으로 부터 훈춘으로 가는  공로변에 있는<룡호><龍虎>라고 쓰여진 기

념비. 1836년에 청정부의 오대징이 짜리 로씨야와 동부 국계담판을 마치고 돌아

 길에 량수천자에 들려 <룡호>라는 글을  돌에 새겨 공적비로 남겼다고 한다.

1940년도에 일본의  학자 烏山喜一에 의하여 발견되여  가치가 중요하다고 인정되여

두만강 기슭에 놓여졌으며, 두만강변에 방치되여 있던 기념비가 1980년도에는 길옆에

정자까지 지어놓고 안치되였다그러나 몇년 못가서 1985년에  2급도로가 닦아

지면서 훈춘으로 옮겨 가고 지금 비석은 짝퉁으로 다시 옮겨 안치되였다근년에

연변에 오대징의 공적비와 동상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량수진 하서촌 구역에 있는 향원 휴가촌에는 몇해전부터 연꽃이 만발하고 있다.

조선국경과는 불과 백메터의 거리 정도에 있는 향원 휴가촌이다.

량수 두만강변에서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의 모습

량수진 하동촌  두만강 넘어 온성군 왕재산에 있는 조선로동당 1 당대회 

념비하얀 기념관과 함께 동조각상과  기념탑이 높이 솟아 있다조선에 김일

 주석은 온성군과 량수천자를 넘나 들면서 항일 투쟁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왕재산 기념비 부근에 있는  두만강변에서 조선에 일군이 소수레로 자갈을 실어

나르고 있다.

일제 시대부터 석탄을 캐기 시작했다는 온성군의 온탄의 탄광버럭은 산을 이루

 있다. 지금도 석탄 생산이 되는지 모르겠다.

두만강 하류의 끝자락으로 부터 올라오면서 두만강에 놓인 5번째 다리온성교

량수진 소재지 마을에서 동남쪽으로 2킬로메터쯤 떨어진 두만강에 자리잡고 

온성교는 두만강에 놓인 불운의 다리중의 하나다온성교에 울려퍼진 폭파

소리는 사라진지 오래고 지금은 양들이 한가롭게 어제를 잊고 풀을 뜯고 있다.

온성대교는 18개의 교각과 2개의 교대로 이루어 졌다교각의 경간길이가 25

메터총길이가  500메터교량너비가 6메터이다상부구조는 강철공형보

멘몰탈로 이루어졌고 교각의 기초는 석탄층에 세워졌다. 일제시대에 량수천자에서 살다가

현재 한국에서 고령으로 생존해있는 김창석 로인의 말에 의하면 온성교는 폭파되기

몇년전의 대홍수에서 의미 질에 문제가 있는 교각 한두개가 무너졌다고 한다.

당시 홍수에 다리가 무너져 조선온성군에서 량수천자로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다리가

무너져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후 나무로 끓어진 부분을 이어놓았다고 한다.

194588 쏘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한후 쏘련군은 150만의 병력을 집결중쏘중몽,

중조 변경 3.500로메터의 전선에서 4갈래로 진격하였다전세가 역전되여 황망히 패퇴

하던 일본군은 쏘련군의 기병과 뛰따르는 땅크부대의 진격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812

이른 새벽에 온성대교의 5번째 교각에 폭약을 묻고 또 거대한 공형보를 교각에서 폭파해 버렸다.

온성교 남쪽에는 두만강북쪽에서는  두만강의 지류 청계하가 두만강에 흘러들

 있다두만강과 청계하의 중간에는 섬이 있다조선에서 두만강에 줄배를

타고 와서 농사를 짓는 땅이다. 100헥타르가 된다는 섬은 옥토이다봄이면 

기구를  배에 싣고 건너와서 농사를 하고 가을이면 배에 경작한 곡식들을 

어서 온성군으로 가져 간다.

두만강의 지류중 청계하도  지류중의 하나일것이다.70년대까지도 겨울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철에나 흐른다산림파괴와 수토류실

 생명수들을 말리워 가고 있다량수는 물이 좋아서 <凉水>라고 이름을 지었

지만 지금은 물이 귀하게 변해가고 있다우리가 어릴적만 해도 도처에 시내물

 샘물들이 찰랑거렸지만 어제의 옛말로 되였다.

두만강과 청계하의 중간에 있는 조선에 서쪽으로는 강도 없이  중간에 있는

버드나무들이 중국과 조선의 국계다자료에 의하면 <본래 온성과 종성사이에

분파되여 흐르는 두만강 중간의 삼각주가 매우 비옥하였는데, 1870년경부터 

근의 주민들이 이곳을 개간하기 시작하여 이곳을 간도 (間島)라고 불렀다이것이

간도의 명칭의 기원이 되였다그후 무산,온성사이의 주민이 도강하여 개간하는

자가 점차 급증하여 백두산 동쪽기슭의 비옥한 토지는 개간하지 않은곳이 없게

되어 이를 모두 일컬어 간도(間島)라고 불렀다따라서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지역

 개간지역을 자연스레 간도라 부르게 된것이다.> 쓰여있다 섬이 간도의

기원이  땅인것이다오늘도 봄에는 두만강을 건너와서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경작한 곡식을 배에 실고 두만강을 건넌다.

량수진 경영촌 앞으로 흐르는 두만강 넘어는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의 풍서리.

 마을은 조선반도의 최북단에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세월을 이땅을 적시면서 흐르는 두만강오늘도 가을바람에 흐느적 거리면서

흐름을 멈추지 않고 있다역사의 눈물의  두만강은 원망도 한탄도 

 조용히 흐름을 재촉할 뿐이다.

 

                    2006 여름가을 촬영

 

이 글을 공유하기:

cya0909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좋아요 좋아요
89
좋아요
오~ 오~
1
오~
토닥토닥 토닥토닥
2
토닥토닥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