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만강과 훈춘강이 만나는 합수목 삼각지대 북쪽에는 삼가자 만족향이 자리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두만강이 유유히 흘러 지나고 남쪽으로는 훈춘강이 흐름을 완만히 하면서 두만강에 안기는 독특한 지리적 위치에 삼가자 만족향이 자리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삼가자 만족향은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가 숨쉬는 고장이기도 하다.

연변 훈춘시 삼가자 만족향은 인구 8692명이 되는 작은 농촌 마을이다.
그중 조선족이 3390명을 차지하고 만족이 2577명을 차지하며 한족은 2725명 된다.
경작지 면적은 2400헥타르가 되고 농촌 인구가 다수를 차지한다.
동북쪽으로 4킬로 정도에는 훈춘시가 자리하고 남쪽에 훈춘강을 사이에 두고 반석진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에 두만강 넘어는 조선 함경북도 새별군이 자리하고 있다.
만족어와 조선어, 중국어 3가지 문자로 쓰여져 있는 삼가자 만족향 인민정부 패쪽 , 그뒤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와 휘장을 단 정부 청사가 눈에 안겨온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초가집이 보인다.
울타리도 없이 어제도 오늘도 하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늦가을 코스모스꽃이 보이는 오솔길을 따라 하얀 초가집이 보인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앉은 농가들이 한적하고 여유가 있는 분위기다.

훈춘 시가지로 염소를 끌고가는 만족 나그네.
그뒤로는 뻥튀기 장수가 뛰따르고 있다.
삼가자 만족향에는 만족이 2577명이 살고 있다.
삼가자 만족향과 멀지 않은 곳에도 양포만족향이 자리하고 있다.
간도지역이 청정부에 의하여 봉금령이 내려졌으면 만족들은 어디에서 여기로 집단 이주를 했을가 ?
그들은 발해의 유적지인 삼가자에서 발해시기부터 오늘까지 살아 왔을가?
역사를 잘모르는 나로서는 미스테리가 아닐수 없다.
중국의 최후의 왕조인 청을 세운 만족은 역사상 말갈, 여진 등으로 불려오다가 만족으로 불려져 왔다.
청이 망한후 만족들은 중화에 동화되여 오늘은 언어나 문자를 소실하다 싶이 되였다.
1982년에 통계에 의하면 중국에 429만9천명이 만족으로 호적상 등록 되였다고 한다.

훈춘으로 부터 삼가자 만족향으로 가는 길가에 몇백년 묵은 거목이
어제를 말한는 듯이 묵묵히 서있다.

삼가자 만족향에는 유별나게 당나귀가 많았다.
두만강변에 자리한 그 어느 마을에도 당나귀는 보기 드문 가축 이지만
여기에는 흔할 정도로 많다.

벼 가을 하러 가는 조선족 나그네.
삼가자에는 팔련성 유적지가 있다고 한다.

풍년 가을이 찾아온 황금 벼밭뒤로 보이는, 나무들이 서있는 곳.
그곳은 우리민족의 역사가 숨쉬는 발해성터가 자리하고 있다.
팔련성이라고 하는 발해성터는 발해5경중의 하나인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가 자리한 성터라 한다.
발해 제3대 문왕의 치세 후기 (781-793)부터 제5대 성왕대까지 발해의 수도 였다.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는 동경이 상경의 동남쪽 바다 가까운 곳에 있다고만 되여있어 1930년대말 까지 정확한 위치 비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0년대초 두만강에 가까운 간도(間島)의 훈춘현 팔련성 유적의 발굴로 정교한 도시 구획자리와 다수의 발해시대 유물이 발견 , 수습됨으로써 현재는 이곳을 동경용원부의 옛터로 비정하고 있다.
대조영을 건국 시조로 하는 발해는 고구려인과 말갈족이 주체가 되여 만주일대의 여러 종족을 합쳐 세운 다민족 국가였다.
고구려인이 주축을 이루고 소수의 말갈족을 지배층에 두고 다수의 말갈족과 기타 종족은 피지배층으로 하는 복합민족 국가였다.
발해는 10대왕 (818-830) 선왕에 이르러서는 국토가 사방 5천리나 되는 강대국이 였다고 한다.
넓은 들과 성터를 멀리에서 바라 보노라니 발해장수들의 말발꿉 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았다.
지금은 역사의 흔적으로 희미한 존재가 되였지만……….

팔련성 소개비에는 간단한 소개 뿐이다.
발해의 문화는 나라의 영토를 상실하면서 대부분의 문화유산을 후세에 전할수 없었다고 한다.
전하고 있는 것은 한문으로 씌어진 외교문서 , 약간의 산문, 몇편의 한시, 문왕의 딸 정혜공주묘에서 발견된 정혜공주와 정혜공주 비문 정도밖에는 별다른 문헌자료를 남기지 않아 역사뿐 아니라 전통과 문화등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밭으로 가을 걷이를 가는 조선족 부부

씨그러져 가는 초가집들
어제의 연속으로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언제까지 이 땅을 지킬지 ?

두만강 언덕에서 세찬 바람을 이겨 내면서 자라온 나무들.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소리없이 이 언덕위 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킬가?

삼가자향 서위자촌에서 본 농가.
집 주인은 한족인지? 만족인지? 알수 없다.
울안은 복잡하다.

흙으로 물매질한 벽에 초가지붕. 이집 주인도 만족인지? 한족인지 알수 없다.
겉 모습으로는 알수 없으니 말이다.
분명 조선족은 아닐것이다.

발해유지 팔련성 부근에 새로 들어선 현대화 탄광들.
발해시기에는 땅밑에 보물들이 있었는지 몰랐어도 지금은 석탄이 보물이라 땅을 뚜지게 됐다.

훈춘강을 사이에 둔 삼가자만족향과 반석진에는 석탄자원이 풍부하다.
그러나 매일 같이 보아 오는 탄광과 석탄무지 이지만 농민들은 가격이 엄청나 땔나무를 등에 지고 다닌다.
그 지역 자원의 풍부가 백성들 에게 혜택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밭에서 가을 타작을 하는 농부들

이땅에서는 언제부터 벼 농사가 시작되였을가?
19세기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민족이 벼 농사를 시작했을까?
아니면 발해시기부터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서 벼 농사를 시작했을가?
여하튼 지금 이 땅에서 땀을 흘리며 벼가을을 하는 사람들은 한족이다.

삼가자 만족향 서위자촌으로 부터 두만강과 훈춘강 합수목으로 향하는 수레길.
그 옛날에도 이러한 길은 있었을 것이다.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 의하면 팔련성 동원용원부 <東京龍原府>는 두만강을 통하여 바다로 진출하여 일본과 신라와 교류를 하였다고 한다.

두만강옆의 가을 풍경.
어딘가 옛 향기가 풍기는 기분이다.

늦가을 가뭄 때문인지 두만강 뚝밑에 작은 고인 물은 흐름이 마른채로 고기 잡이군들에게 저당잡혀 있다. 젊은 조선족 농민의 투망질 솜씨는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두만강과 훈춘강이 만나는 합수목 지대로 물고기가 많이 서식한다고 한다.

온종일 멍하니 훈춘강 하구를 응시하는 한족나그네.
< 여기서 무얼 하는 가고 > 문의 하니 숭어떼를 기다린다고 한다.
운수 좋은 날에는 얼마간 잡고 어떤 날에는 허탕을 친다고 한다.
그 인내가 무섭다.

훈춘강이 두만강과 만나는 하구의 풍경.
소 들은 물가에서 가을 햇빛을 만끽하고 있다.

늦 가을이라 겨울을 대비하여 쉬고 있는 쪽배들.
백양나무 숲에도 , 하구마을에도 쉬고 있는 쪽배들이 많다.
우리 조상들이 기사년 조선 6진에 들이 닥친 대재앙을 피하여 이런 쪽배들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 이땅에 천입하였을가?

훈춘강을 배로 건너서 반석진에 당도할수 있다는 말에 배로 강을 건너기로 했다.
반석 신농촌 쪽에 높은 소리로 배사공을 몇번 불렀더니 배가 온다.

서서히 미끄러져 오는 배.
아주마 배사공이다.
널판자를 드리우고 배에 오르라고 한다.
뱃삯은 상상외로 싸다.
한사람당 1원,오토바이도 1원 이렇게 3원이라고 한다.

우리와 함께 두만강변을 주름잡아 달리던 오토바이도 이순간은 호강을 한다.
배를 타고 훈춘강을 건너니 말이다.
그런데 오토바이를 배에 싣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중국 산동 말투의 배사공 아주마는 남편과 함께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아 팔고 뱃삯 값도 벌면서 생계를 유지한다고 말한다.

배에 앉아서 맑고 푸른 훈춘강에서 털낚시질을 하는 풍경을 보는라니 묘한 기분이다.

훈춘강 하구에서 한가롭게 주인을 기다리는 쪽배.
어제도 주인은 있었을 것이며 오늘도 주인은 있을것이다.
다만 우리가 누가 주인인지 모를 다름이다.
작은 강은 흘러 큰강 으로 가고 싶어하고 큰강은 바다로 가고 싶어 한다.
두만강은 훈춘강을 안고 오늘도 소리없이 조용히 동해로 간다.
어제날의 많고 많은 이야기들을 잊은 뜻이 말이 없이 흘러가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는 많은 사연들이 숨겨져 있었겠지만…….
2006년10월3일

사진들 너무 좋습니다. 작품이고 사료네요.
감사합니다.
훈춘강을 배로 건너는 장면들이 인상 깊네요. 노 대신 밧줄을 당기면서 배를 젓는 🚣
줄배라고 하는데 …. 지금은 모두 사라져서 볼수 없습니다.
현재 시골에서 전통 가옥이나 풍습 같은 것을 찾아 보기 힘듭니다.
그때 까지는 얼마간 남아 있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