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화제가 되는 조선어에 대한 주제와 어느정도 연결이 되는, 일년전에 썼던 글을 다시 올리고, 말미에 지금의 생각을 조금 말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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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억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의 머릿속에 박제된 것은 미닫이문에 바른 조선어문(한글) 교과서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릴 적 우리집은 새로 지은 집이었으나, 그때까지 고향에는 일본식 가옥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그중 한 예가 부엌과 정지 칸(아랫방) 사이를 막은 일본식 미닫이였다. 미닫이문은 격자 틀에 하얀 종이를 바르는 것이 예사였는데 우리 집 풍경은 조금 달랐다. 막내 삼촌이 다니던 인쇄공장에서는 종종 잘못 인쇄된 폐기품이 나올 때가 있었고, 삼촌은 그중에서도 초등학교 저학년 조선어문 교과서에서 나온 폐기품을 우리 집에 가져다주었다. 산뜻한 삽화와 한글이 찍힌 조선어문 교과서가 부엌 미닫이 문에 발라졌고, 나는 그 앞에 앉거나 누워서 그 반복되는 단락들을 쳐다볼 때가 많았다. 

부모님의 기억도 그렇고, 나의 기억도 다르지 않은데, 여섯살에 나는 집안에 굴러다니는 꽤 부피가 있는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걸 보면 글을 빨리 익힌 셈이다. 누가 나에게 글을 가르쳤냐고 물어보면 어른들의 대답은 서로 다르다. 어머니가 또는 아버지가 가르쳤다는 말도 있고, 삼촌이 가르쳤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나는 유치원에 거의 다니는 둥 마는 둥 하였으니 집에서 깨우친 부분이 큰 것 같다. 미닫이 문에 찍힌 활자가 계몽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유치원에 다니지 않은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할머니와 함께 보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나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다. 할머니는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가족 모두가 아니까. 그럼 할머니는 학교를 전혀 다니지 않았단 말인가? 그건 아니라고 한다. 빨래터에 갔다가 비행기가 날아가는 걸 본 할머니가 “히꼬끼”라는 단어가 들어간 알 수 없는 말을 읊으시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제정 때 배운 일본말”이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우리말이 아닌 일본말을 가르치던 학교에 다녔던 그 옛날 만주 소녀였다. 

그런 할머니여서 그랬던지 손녀가 책만 들고 있어도 좋아하셨다. 또 내용을 모르니 내가 뭘 읽는지도 모르셨던 “덕분”에, 부모님들이 출근하고  비운 집에서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시리즈로 된 어린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부피가 있는 어른 책에 손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 집엔 제대로 된 책장이 있었던 건 아니고, 가족 중에 독서를 가장 좋아하는 막내 삼촌의 책과 잡다한 내용이 들어있는 조선어 잡지들이 구석구석 쌓여 있었다. 그 책들 중에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팔선녀”라는 전설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야설 같은 내용들로 가득한 책이었으나, 장수의 삽 끝에서 백두산 봉우리가 생기고, 부잣집 며느리가 집안의 머슴과 도망가는 그런 이야기들도 난 그저 드라마를 보듯 재미있게 읽었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막힘이 없었던 나의 우리말 독서는 어머니에게 나를 한족학교(중국어 학교)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명색이 중국 사람이지 아무리 애를 써도 중국어가 한족들에 비해 달렸던 부모님 세대에게는 그 아쉬움이 민족성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큰 실제적인 한계였던 것이다. 어린 자식이 우리말로 말도 하고 글도 읽으니, 이젠 됐다 싶으셨나 보다. 가을이 되자 나는 한족학교에 보내졌다. 

흔히들 사회적인 격변은 한 세대의 정서를 바꾼다고 말한다. 나는 계절 하나 바뀌고 살던 동네에서 삼십분 떨어진 곳에서 학교를 다녔을 뿐인데 그 격변을 실로 경험했다. 여자애 치고는 동네에서 내로라 하던 골목대장이었던 나는 한족학교 등교 하루만에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몇 마디 말은 알아듣겠으나, 의사 표현이 어려웠다. 말이 많던 아이가 말을 못 하니, 자연스럽게 주눅이 들었다.  누가 정해놓지도 않았건만, 조선족 동네 한족 동네로 나뉘어 살던 30여 년 전의 고향에서, 나는 중국어라고는 드라마 주제곡만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던 영락없는 조선족 어린이였으니까. 

그렇게 거의 일년을 한족학교에 다녔다. 친구도 생겼으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를 만만하게 여기는 게 보였다.  여전히 조선족 친구들이 그리웠다. 동네에서 같이 놀던 아이들은 전부 조선족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가끔 자기들끼리 모여 숙제를 같이 하곤 했다. 조선어문 교과서를 보니 전부 내가 아는 내용이었다. 교과서를 뒤집어 맨 마지막 과문을 보니 어릴 때 우리 집 미닫이에 붙어있던 내용이 보인다. 자다가 꿈결에도 소리 내어 외울 수 있는 이야기다. 마음이 싱숭생숭 해났다. 지금에 와서 그때 그것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되짚어 본다. 잘하는 것을 마음껏 뽐내고 싶은 여덟 살의 마음, 동네에서 모두 나의 “수하”에 있던 친구들 무리에서 다시 대장이 되고픈 마음이 아마 팔할 쯤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구석에는 “나는 저기에 속한다.”라는 마음이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익숙한 글로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지도. 

생각의 씨앗이 마음에 자리 잡고 나니, 자고 일어나면 그 마음은 늘 전날보다 배가 되어 있었다. 작은 머리를 굴려서 어떻게 하면 그곳에 갈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으나, 그럴듯한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머니에게 틈만 나면 말했다. 조선족 학교에 가고 싶다고. 소침해진 나의 변화를  느끼셨던지, 생각 밖으로 어머니는 수월하게 나의 요구를 들어주셨고 어느 겨울날, 나는 조선족 학교의 교실에 처음으로 들어서서 아이들에게 내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해 줄 것만 같았다. 드디어 내가 속한 곳에 돌아왔다!

일년을 그리워했던 만큼, 나는 빠르게 조선족 학교에 적응했다. 나의 전학은 옳은 결정이었음을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집에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숙제부터 하였고, 조선어문 수업에서 따로 과문 외우기 숙제라도 내주면 큰소리로 외워가며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음을 온 집식구가 알도록 하였다. 보여주려는 마음이 컸으나, 그때의 나는 정말로 즐겁게 학교를 다녔던 것이 분명했다. 

슬슬 조선족학교 다니기가 굳혀지자, 어릴 적 전설집을 읽던 아이는 이야기가 고팠다. 어머니는 나를 주기적으로 서점에 데려가셨고, 3,4학년쯤 되자 아예 용돈을 주어 혼자 서점에 책 사러 보내셨다. 그때 서점에는 우리 나이에 맞는 조선어 책들이 꽤 많았다. 간혹 민족출판사에서 출간한 한국동화집도 있었고 한국소년 글짓기 모음집도 있었다. 맞춤법이 우리의 것과는 조금 다른 한국 도서들은 나에게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고, 한국 초등학생들의 글짓기 또한 내가 학교 숙제로 쓰던 작문과는 조금 다른 멋이 있었다. 어딘가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이 아롱거리던 글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정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일이 생겼다. 소년문화센터의 도서관에 우연히 친구를 따라갔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토록 강한 시각적 충격을 경험하였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에게 그때 느낀 감정을 설명할 때면 숨을 한번 고르고 말을 시작한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예쁜 원색의 가죽의자들이 200제곱미터 남짓한 공간에 여러 모양으로 놓여 있었고 곳곳에 가득한 책장에는 세련된 글꼴과 그림이 찍혀있는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한국 도서들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 권을 뽑아보았다. 책이 이렇게 예쁘다니, 종이는 또 어쩜 이렇게 반들거리는 건가. 자본주의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해 겨울 방학,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일찍 도서관에 도착하여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한 번은 늦게 나와 보니 나의 새 구두를 누가 신고 가버렸다. 남겨진 헌 운동화를 신고 집에 가면서 느낀 허전함과 낮 동안 책을 읽은 기억이 겹치면서, 그날은 제법 극적인 하루로 기억 속에 자리하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그때 그 도서관의 시설과 책들은 전부 한국에서 기증한 것이었다.  시간을 되짚어보니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지 얼마 안 된 뒤가 맞는 것 같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구할 수 있는 우리말 도서가 많지 않았고, 이미 중국어에 익숙해진 터라, 구하기 쉬운 중국어 책을 더 가까이했다. 중학교부터 6년간 구독한 잡지 또한 중국어 잡지였다. 그러나 책이 비운 우리말의 자리를 이번에는 드라마가 채워줬다. 그 무렵 처음으로 들어온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난생처음 우리와는 다른 억양의 우리말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참으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우리 반에는 한국 남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우리가 보는 드라마와 같은 억양을 구사하던 그 아이는, 오히려 우리 사투리를 배워서 따라 하려고 했던 재미있는 기억 또한 있다.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갔다. 내가 간 대학에는 외국 교수님들이 많이 계셨고, 자연스럽게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수업을 듣게 되었다. 좋아하고 익숙한 모든 언어가 가까이에 있으니 하루하루가 신바람이 났다.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였으나, 아직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유학을 갔다. 중국 여권을 소지한 나는, 외국에 가니  조선족이란 수식어는 생략되고 그냥 중국인이 되었다. 코리안 차이니즈(Korean-Chinese)라고 설명을 해도 그건 나에게만 중요할 뿐이었다. 그럴수록 내 안의 코리안 에고(ego)가 머리를 드는 것은 웬일인가. 어릴 적 한족학교에 다닐 때와는 또 다른 갈등이었다. 불편한 건 없는데 무언가 정리되지 못하고 정립되지 못한 느낌, 정체성의 갈등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읽은 어느 책인지 교과서에서 ‘heart language’ 즉 ‘마음의 언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많은 언어를 할지라도, 마음의 언어는 누구에게나 따로 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의 언어가 우리말임을 알았다. 즐거움을 위한 독서든, 정보 습득을 위한 독서든, 가장 쉽게 읽히는 것이 한글로 된 책이고 제일 좋아하는 작가도 한국 작가 박완서 선생님이었다. 간혹 SNS에 쓰는 글은 한어나 영어를 쓰기도 했으나, 나만 읽는 일기는 오로지 한글이었다.  중국어나 영어로 대화를 하면 한 시간만 되어도 피로감이 들었으나, 같이 살던 한국 언니와는 할 말도 많고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나를 표현하는 것은 우리말 우리글이 가장 편했음에 분명하다. 

유학을 마치고 난 뒤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그러나 영어 외에도 나는 아이들이 하는 제1언어에 관심이 많다. 그간 가르쳤던 조선족 학생들의 많은 수가 이제는 조선말보다 중국어를 더 편하게 여긴다. 그게 굳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그렇진 않다. 그 아이들은 아직 경험할 넓은 세상이 있고 겪어야 할 자기 몫의 수많은 갈등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온전히 자기의 인생을 살고, 누가 정해준 것이 아닌, 국가나 민족이라는 공동체에 얽매이지 않은, 자기만의 마음의 언어를 발견하기를 바랄 뿐이다. 

간혹가다 친구들 사이에 또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조선족의 제1언어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모국어는 무엇인가라는 토론이 펼쳐진다. 사실 아주 애매하다. 중국어가 모국어라고 하기에는, 우리말을 더 잘한다. 그렇다고 우리말이 모국어라고 하면, 그것 역시 틀린 답이라고 누군가 말해준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답이 다르면 서운해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 어찌 꼭 정답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같은 민족이어도 개인이 살아온 과거와 처한 현재와 나아갈 미래가 다를 텐데. 누구에게도 강요치 않고, 강요받고 싶지도 않다. 

좋아하는 한국 시인인 조기영 시인의 시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매일 밤 모국어의 불을 켜 어딘가 들어갔다 돌아오는 내가”. 모국어의 불을 켜다, 참으로 영롱한 표현이다. 아쉽게도 나는 아마 평생 모국어라는 단어를 맘 편히 사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아쉬움이 서럽지는 않다. 나는 그저 자주 “마음의 언어라는 불”을 켜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우리말을 모국어라고 말하지 못한 자, 마음의 언어라고 말하련다. 

【2019 KBS북방동포대상수기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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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후에 쓰는 생각:

우리 말이 나의 마음의 언어라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의 언어가 강요될 수는 없다는 생각도 여전하다. 그런데 요즘의 상황을 보면서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불과 일년전만 해도, 연변의 조선어 공교육은 흔들리고는 있을지라도 언제까지고 이어질 줄 알았을때에나 했던 맘편한 소리였는가. 조선어냐 한어냐의 논쟁속에서도 개인의 선택은 강요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허나 코로나의 대환장을 겪고나서 눈앞에 다가온 이 상황은 자꾸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마음의 언어 타령이나 한게 부끄럽지 않냐고. 

다시 정리해봐도, 그 생각이 안이했던 것은 인정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래 세대의 앞으로의 언어 선택은 그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각자가 선택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즘 조선어의 약화를 우려하는 분들이 쓴 많은 글들에 격한 공감을 하며 모멘트에 실어날랐다.  

시스템이나 제도의  변화는 개인의 선택과는 별개의 문제로, 집단적인 동의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넓은 대륙에서 한어의 강화는 자연스러운 추세이나, 조선어의 강화는 자치주에서나마 환경이 마련되어야 선택이라도 할수 있지 않은가. 

아직도 회자되기만을 반복하고 있는 그 일의 답, 아직 논의중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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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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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음의 소리.. 참 마음에 와닿는 말입니다.

    제1언어의 선택은 미래의 새싹들이 선택하는건 사실이지만 민족의 본을 잃지 않게 정확하게 인도하고 나아갈 길에 빛을 비추어 주는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육업계 종사자나 조금이라도 민족정체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청년,중년분들의 책임과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 세력이 큰 민족이나 문화에 쉽게 융합되고 정체성을 잃는것은 시간 문제라고 봅니다..

  2. 이메일에서 댓글 링크 타고 오랜만에 우리나무 들어왔다가 매력적인 글에 반하고 갑니다. 😍 외국에 살다 보면 모국어를 체크해야 할 일이 많은데 저는 고민없이 Korean을 선택합니다. 영어로 된 선택사항이어서 조금은 쉬웠던거 같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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