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의 하류에 방천이라는 어미지향의 마을이 있다

한눈에 3국을 바라본다는 방천촌은 경신진 지역인데 면적은  14평방키로메터로서 동남은 로씨야와 잇닿아 있고 서남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마주하고 있는  3국이 정족지세를 이루고 있는 두만강 하류 지역이다

여기에는 < 닭 울음소리 3강에 들리고 개짖는 소리 3국을 놀래우네  >라 신비의 땅으로서 대대로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였다.

두만강 하류에서 조선과 로씨야를 관통하는 다리 아세아 대륙과 구라파를 이어 놓은 다리기도 하다.

다리위는 철근 구조로 이루어졌는데 구쏘련측의 철근 구조물이 조선측 보다 얼마간 높다

쏘련과 조선은 형제적인 우호적인 나라인데 쏘련이 형님격이 된다는 의미에서 설계에서 분촌이 반영되였다고 한다.

조선전쟁 당시 로씨야에서 조선에 지원되는 물자가  다리로 통과 되였다.

미국에 폭격기들이 다리 부근 상공에 나타나면 쏘련의 반격으로 하늘은 온통 붉은 바다가 되였다고 당지 로인들은 지금까지 전설처럼 이야기 하고 있다.

로씨아 빈해변강구의 하쌍진(원명뽀드걸나아진) 주요하게 산지 평원 소택과 호수로 조성되였는데  3국의 교접 지대이기도 하다.

로씨아 측에 있는 로씨아군의 군영 

로씨야 군대들이 훈련하는 모습들과 말소리까지 들리기도 한다.

로씨아측의 하쌍진의 인구는 2300여명인데 주요하게 군인과 철로 로동자 들이다.

군부 시설외 하쌍진 기차역은 이진의 주요한 조성부분으로서 조선과의 무역을 책임지고 있으며 두만강에 놓인  철로대교로 화물수송을 담당한다

이곳은 로씨아 내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의 오지로서 인구 밀도가 적고 공업기초가 박약하며 경제발전이 상대적으로 락후한 상태에 있다고 한다.

조선과 로씨야를 이어놓은 철로대교로 부터 15킬로메터를 흐르면 두만강은 동해에 흘러든다고 한다

지척이지만 멀기도 한곳이다

옛날에는 마음대로 쪽배를 타고 바다에 까지 다녀 왔다고 한다.

방천의 동남 방향의 두만강 남쪽은 조선의 라진선봉의 두만강 로동자구역인데 750 3천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구역내의 주요 주민은 철로 로동자들과 가족들 이며 라진과 43킬로메터 떨어져 있고 우의 철로대교로 로씨아와 연결되여 있다.

 두만강 건너 남색 기와 집은 김일성 주석의 휴양을 즐기던 곳을 기념하는 전람실 이라 한다.

<자패>는  변계남단에 자리잡고 있는데 1886 로에서 훈춘동부변계를 재확정할때 청조 좌부독어사인 오대징이 세운것이다.

 <자패>는 높이 1.44메터,너비0.5메터,두께0.22메터인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는데 중국측 정면 한가운데는 <토자패>라는 커다란 세글자가 새겨져 있고 좌측에는 <광서12 4월립>이라는 글자가 내리 새겨져 있으며 로씨야 방향으로는 로씨야 문자< T >자가 새겨져 있다. 《자패》는 우쑤리강 어구로부터 두만강어구에 까지 설립한 () , () , () , () , () , () , () , ( 8 변계선에 세워진 비석중의 하나이다.

국토의 표지를 알리는 비석이다.

로씨야 방향에 새겨진 《 T 》자 , 비석 일부가 파손되여 세멘트로 땜질을 했다.

자패》와 나란히 서있는 로씨야측 패말

<토>자패 뒤로는 중국과 로씨야 변경선을 가로지르는 가시 철망이 새워져 있다.

세워진 오래되는지 말뚝은 나무로된  왜소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방천에 있는  3국을 바라볼수 있는 망해각과 중국군의 초소 .

 까지는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여 있으나 < 자패 >는 일반에 공개되여 있지 않다.

방천촌은 두만강 끝자락에 있는 마을로서 예전부터 우리민족의 삶의 터전이다.

19세기말 20세기초반 까지 훈춘지역의 백성들이 구쏘련 연해주와 무역 거래를 하는 주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19578월에는 특대홍수가 방천 양평관 구간을 떠밀어 가서 옛 쏘련의 오솔길을 빌려서 주민이 통행하는 불편한 시기도 있었다.

19721월부터는 조선의 원정리로 부터 진산동으로 이르는 45킬로메터의 도로를 빌어 방천촌민들이 바깥 나들이가 이루어 졌다.

그러다가 198310월에 양관평 언제길이 준공되여  4분에1세기동안 구쏘련 조선의 길을 빌어 다니던 국면에 종지부를 찍었다

지금은 아스팔트길 까지 관통되여 관광객들과 촌민들이 상당히 편리해 졌다.

방천촌의 평균 해발고는 겨우 5메터 남짓하여 길림성에서 제일 낮은 고장이기도 하다.

방천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 철벽방천 > 이라는 글이 새겨진 비석

방천촌에는 지금은 오십여호의 농가에 120명 좌우의 촌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국가에서 일정액을 재정 지원하는 방식으로 새 집을 짓는 집들이 많았다.

방천은 물산이 풍부한 고장인데 새치봉 늪 장고봉 늪 ,연꽃 늪등 3개의  늪이 있다.

사진은 마을 앞에 있는작은 

90년대초 훈춘개방의 바람이 불어치면서 사람들은 훈춘이 삽시에 심수가 되는 줄로 착각하였다.

3 국경지역에 있는 방천에도 길가에 음식점과 유흥장소가 들어섰다.

그러나 꿈이 깨지면서 그때 세워졌던 영업장소가 지금은 페가로 되여 관광객들에게 스산한 기분만 안겨 주고 있다.

방천촌 지역에는 옥수수와  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었다.

한전 농사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것 같았다.

방천촌에 있는 초가집 , 그 당시 초가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방천에 있는 장고봉 사건 발생지라는 표지

장고봉 유적지의 이름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

 

1938 715일 일본은 구쏘련의 중 쏘  변경지대의 군사포치와 실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3명의 일본군을 쏘련경내에 파견하였다.

그들이 쏘련군의 군사시설을 촬영할때 쏘련군에 의하여 발견되였는데 한명이 당장에서 사살당하고 기타 두명은 황망히 도망을 쳤다.

이사건은 장고봉사건의 도화선으로 되였다.

731일밤12시 일본군은 조선의 홍의리에서 장고봉을 향해 폭격을 시작하였으며 포화의 엄호하에 새벽에 장고봉을 점령했다

쏘련군은 진지를 되찿기 위해 비행기 땅크와 대포를 출동하여 장고봉에 맹렬한 공격을 진행하는 동시에 비행기를 끊임없이 출동하여 조선경흥 고읍 등지의 일본군 증원부대를 폭격했다.

쏘련군은 권하 조대교를 봉쇄하였고 해군함대는  두만강 어구를 봉쇄했다

일본군 후방은 쏘련군에게 봉쇄당한후 손실이 엄청났고 계속 작전할 힘이 없었다

로씨아와 일본은 그해 810일에 모스크바에서 장고봉 정전협의를 달성함으로써 13일간의 장고봉의 치열한 전투의 결속을 선포하였다

그번 전역에서 일쏘 쌍방의 사망자수는 5940여명에 달했다

장고봉 사건후 일본군은 두만강 항로를 봉쇄해 버렸는데 그때로 부터 지금까지 중국의 출해권은 중단되여 있다.

  장고봉 전투 기념관의 내부 전시실

장고봉 전투 현장에서 파낸 총탄알

장고봉 전투장에서 주어온 폭탄 잔해

장고봉 전투에서 파괴된 조선족 민가 ,

얼룩소도 폭격에 죽어있다.

장고봉 전투 정전이후에 피신했던 방천촌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모습의 옛사진

흑룡강에서 훈춘이 개방한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가 음식점을 경영하다가 그만두고서 지금은 장고봉 전투 기념관을 꾸리고 있는 장씨성의 한족 나그네 

혼자의 힘으로 장고봉 전투 현장에서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유물들을 찾아내여  전람관을 세웠다고 한다.

자금이 부족하여 유물들을 저당 잡히고 은행에서 자금을 대금 받아서 기념관을 운영한다고 한다.그의 노력은 감명깊었다.

그러나 노력한만큼 돌아오는 것이 적다고 한다.

여행사들에 팁을 언저 준다고 해도 찾아오는 관광객이 희소하다고 한탄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조선말 해석이 한글자도 없었다 

오른쪽이 전람관 한족주인 )

방천으로 가는 길옆에 있는 모래산.

두만강 하류라 강모래 바람이 산을 덮어서 생겼는지 의문스러운 모래산이다.

 방천관광구 에서는 모래산 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있다.

작년에 세워진 같은 오대징의 조각상 모습

토 >자패를 세운 인물 이기도 하다.

청조 좌부독어사로 지낸 오대징은 두만강 연안의 변계문제에서 청정부를 대표하여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방천촌민들은 밭은 대부분 한족들에게 양도하고 두만강에서 쪽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다.

두만강 하류에는 바다가 가까워서 황어 송어 , 연어  물고기가 많다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에 보탬을 한다고 한다

두만강에서 지금 쪽배를 볼수 있는 곳은 이곳 뿐이다.

두만강에서 유일하게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은 방천촌이다. 

얼음이 녹아서부터 민물고기 잡이가 시작된다.

숭어가 그물에 걸려나오고 있었다. 

숭어는 값이 싸고 송어와 연어는 값이 좋다고 한다.

두만강 건너편 조선에서는  걷이가 한참이다.

방천으로 가는 길옆에 있는 유엔세계공원 이라는 조각상.

3국이 인접한 특수한 지리조건에 생태보존이 완전하다고 세워졌는지…..

방천으로 가는 길옆에는 중국과 조선을 이어놓는 권하 중조 륙로대교가 있다.

조선과의 무역이 이루어 지는 권하대교이다.

량국의 많은 물자들이 서로 주고 받고 교역 되였고 몇해전에는 많은 도박군들이 일획천금의 꿈을 안고  다리를 넘어서 라진 도박장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조선측 원정리 세관 ,  세관을 통하여 중국측에서 조선 라진으로 가고 있다.

방천으로 가는 길옆 권하에는 안중근의 기념비가 있었다.

안중근의사는 방천등지에서 항일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생평 비석뒤에 있는 

안중근 의사가 항일운동을 하면서 머물던 옛집의 모습

안중근의사가 머물던 초가집 내부의 모습

서까래가 깔려있는 집안에는 조선 가마솥이 3개가 나란히 부뚜막에 걸려 있었다.

방천경신지역에 전설로 남아 있는 아흔아홉 굽이 물도랑

구비구비 두만강은 하류를 거쳐 동해로 흘러간다.

두만강 하류는 대체적으로 강폭이 넓고 물이 깊으며 물고기와 조류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오늘도 소리없이 역사를 뒤로 하고 조용히 동해로 흘러가는 두만강은 말이 없다 ……

          2006104     촬영              (  잛고도 긴 두만강  ) 연재 끝 

이 글을 공유하기:

cya0909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좋아요 좋아요
29
좋아요
오~ 오~
0
오~
토닥토닥 토닥토닥
0
토닥토닥

댓글 남기기

  1. 저는 고향이 훈춘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방천 양어장에서 몇년 지낸 이유로 방천에 자주 놀러갔었습니다. 배타고 연못에 가서 연꽃구경도 자주 했었고 저 사진에 나오는 몇몇 곳은 흐릿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곳도 있습니다. 산속의 양어장으로 들어가는 길 중간중간 큰어머니집에서 먹는 것과 같은 푸근하고 푸짐한 인상을 줬던 음식점도 몇개 있엇던 거 같습니다. 삼국변경지대로 이름난 훈춘의 5A级旅游风景区도 여러번 가봣지만, 어릴적 아빠따라 다니던 기억이 훨씬 인상에 남아 추억이 소환되는 듯한 글이었습니다. 그 산속엔 뱀도 있고 메돼지도 있고 꿩도 소도 노루도 강아지도 토끼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오두막 같은 작은 집과 그 앞에 고요한 호수도요… 어럼풋하지만 방천은 분명히 행복한 곳이에요, 적어서 저한텐.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