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훈춘시 경신진 남쪽으로  20리쯤 나가면 회룡봉촌 이라는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두만강이 3면을 감돌아 흐르는 회룡봉거의 타원형으로 돌아 흐르는 모습을 룡이 돌아간다는 (回龙)으로 비유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우리 민족의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장이다.

두만강 건너편은 조선 아우지가 자리 하고 있다 .

두만강변을 따라 가다 보면 하류 지역이라 강폭도 넓고 시원한 풍경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회룡봉촌은 1862 청나라 통치초년  조선 말기에 함경북도 이주민 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와 회룡봉에 정착하면서 부터 145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마을이다.

회룡봉촌에는 2006년도 까지는  초가집이 많았다.

우리 선조들 숨결이 들려 오는 하얀 회칠을  초가집이 정답게 눈에 안겨온다

지난 세기 50-60년대 까지만 해도 두만강에서 후리그물로 엄청난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에서 힘깨나 쓰는 청장년들이 동원되여 ( 어영차 )를 부르면서 후리그물을 끄스면 한후리 그물에 삼사백근이 고기가 잡혀 나왔다고  한다.

늦가을 성에장이 내릴때면 만여근이 고기가 잡힐 때도 많았다고 한다.

한켠에서는 소수레로 고기를 나르기에 바빳다고 하니 …..

마을 인심 또한 후덥기로 린근에 손문이 있는 살기 좋은 고장이 였다.

낮은 산등성이를 등지고 지어진 초가집들,  회룡봉촌 앞으로는 두만강이 굽이굽이 흘러서 바다 향하고 있다.

풍수가 좋아서 인지  작고작은 마을에 인재가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초가집앞에 초모자를 쓰고 서있는 농부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도 추억속의 어제날 모습 같아 인상적이다.

어디에서 오는 사람들이요 하고 묻는 할머니 , 80 가까이 회룡봉에서 살았다고 한다.

기분좋게 웃는 할머니 두만강을 건너 이땅에  우리 계레들의 모습이 상기된다.

억척같이 두손으로 땅을 개척하고 벼농사를 시작하신 선조들……..

마당에 놓여 있는 소수레  수레 옆으로는 싸리나무 울바자  뒤로는 하얀 초가집 

두만강변에 자리를 잡은 선조들이 삶이 현장이 그 때까지도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회룡봉촌은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 민족의  삶의 공간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여 있는 자연박물관과 같은 고장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 한국으로  떠나다 보니 마을에는 로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회룡봉 초벌등 산기슭에 100 넘는 전형적인 조선 팔간기와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회룡봉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1952  집을  박영규로인 (81) 소개에 따르면  집은 유동렬이란 사람이 지은 집인데 워낙은 머슴 살이를 하던 사람이 였다고 한다.

머슴으로 일하던 유동렬은 성실하고 부지런하여 얼마 안가 주인집에서 사위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땅에서 버젓이 팔간집을 짓고 살아보리라는 소원으로 3년을 준비하여 지었다는 이집은 목재와 석재구조로 지어졌다.

우리민족의 전통 한옥의 품위와 조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두만강 연선에서  전통 한옥중에서 보존상태나 짜임새가 빈틈없기로  손에 꼽히는 한옥이다.

십년뒤 2016년에 다시 회룡봉촌을 찾아 가니 옛 기와집은 관광의 목적으로 깔끔하게 정비가 되여 있었다.

오래된 느릅나무 두쌍이 역사의 증인 처럼 옛 기와집 동구에 서있다.

회룡봉촌의 서쪽에 위치한 ( 회룡봉혁명석굴 )기념비 누군가 추석이 가까워 오니 수박 한쪼각을 올려 놓았다

회룡봉 혁명석굴은  천연바위로 되였으며 석굴안 공간은 높이 1.5메터 ,동서1.8메터 ,남북4.8메터로 되는 동굴로서 1933년초 일본 수비대와 자위단이 회룡봉을 토벌할  항일투사 30여명이 피신했던 곳이며 연통라자 근거지로 물자를 수송하는 비상의 수송점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회룡봉촌은 훈춘지역에 널리 알려진 항일근거지이다.

회룡봉촌에는 항일투사 19명 항일렬사29명 ,해방전쟁과 조선전쟁까지 101명의 투사와 렬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중에는 이름있는 장군들도 있다고 한다

( 1907 – 1947 )조선인민군 창건당시 총참모장 안길 조선인민군 공군사령 안영호  (안길의 장남 1934년생 조선인민군 총후근 부장으로 있은 안영환 ( 안길의 차남 1935년생 )  조선인민군 기률검사위원회 주임 박남룡 소장 한국 론산훈련소 소장 박남표  11명의 장령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상해림시정부 대표인물이며 재정을 장악했던 한형권도 회룡봉 사람이라고 한다

위에 사진은 좌로부터 김일성 계청 최현 ,안길이 찍은 사진이다.

오른쪽에 키가 큰분이 안길장군이다.

33평방키로메터를 차지하는 회룡봉에는 200여호의 조선족들이 아기자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120여호에 460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경작지 280여헥타르가 주요 수입원이라고 한다.

회룡봉촌에서는 50년대로부터  50년사이 98명의 대학생 , 53명의 중등전문학교생이 나왔다고 한다.

그중에는 이름있는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교수와 박사 정치인 ,경제인  여러분야에서 활약하는 인재들이 많다고 한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엄청난 유명인사가 배출된 것은 경악스러운 일이다.

촌사무실 마당에서 한가롭게 문구를 치는 마을 조선족 로인들

두만강 건너 이주민의 역사가 살아 있는 회룡봉촌에는 초가들도 다양하다 .

낮고  형태의 집도 있고 덩실한 초가집도 보이며 이렇게 앞에 대들보를 한줄로 세워 지은 집도 있다

회룡봉 처럼 우리민족의 전통과 역사가 생동하게 남아 있는 지방도 많이 않다.

이제 얼마나 우리 전통의 지켜질지는 미지수이지만  …..

회룡봉을 사랑하는 지성인들이 힘을 모아서 길림성에서 처음으로 회룡봉의 역사를 담은 촌지를 출판하고 작년에 회룡봉 정착 144 기념행사도 마련했다고 한다.

감명 깊은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십년이 지난 2016년에 다시 회룡봉으로 향하니 길은 콩크리트로 되여 있지만 두만강에는 철조망이 세워져 있다.

철조망 넘어로 두만강이 소리 없이 흘러 가는 풍경 넘어로 조선의 산들이 한눈에 안겨 온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더니 옛 초가집 들은 사라지고 획일적으로 모양이 같은 벽돌 집들이 모여서 마을을 다시 이루고 있다.

십년전에는 자연을 품고 넓게 산재한 초가집 들의 인상적이 였는데 ….

마을에 조선족 할아버지는 옛 집들을 모두 허물고 지금은 벽돌집을 지었다고 한다.

산등성이를 등지고 오붓한 벽돌집들이 보이고 마을 앞으로는 논 밭이 펼쳐져 있다.

농사를 하는 조선족 농부는 없고 지금은 벼 농사도 한족들의 몫이 된지 여러 해가 된다.

회룡봉촌에는 산과 초지가 많아서 방목을 하는 소떼가 많았다.

두만강은 흐름을 멈추지 않고 동해로 흘러 가지만 회룡봉촌 같이 역사가 있는  우리 조선족 마을들은 언제 까지 선조들의 숨결을 간직하고 살아갈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백년 , 이백년의 역사는 억겹속에서는  찰나나 ,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 이다.

            사진촬영 : 2006년 10월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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