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이민실록] 013. 황치일 가족 (길림성 연길시)


황치일, 남, 1913년생
길림성 연길시 북산가 2가 9조 거주

내 고향은 강원도 울진군(지금은 경상북도에 속했음) 온정면 소태리인데 그때 마을에 인가가 한 30여호 됐다. 우리 집에는 부모하구 나보다 다섯살우인 형님하구 나까지 이래 네식구였다. 우리 마을은 참 좋았다. 그때 인심두 좋았다. 마을엔 정가성을 가진 지주가 하나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땅이 없구보니까 그 집 머슴살이를 했다. 우리 어머니는 이웃집 보리방아를 찧어주구 마을에서 잔치 지내구 장사지낼 때 술두 빚어주구 했는데 저녁에 술을 빚으면 이튿날 저녁엔 꼭 먹을수 있게 빚었다.

그때 인품이 좋다 해두 지주 착취는 심했다. 우리 집 같은건 생활이 말이 아니였다. 형님과 나는 거의 빤쯔 하나만 입고 지냈다. 어른들도 겨우 겉옷만 입었지 속벌이라곤 모르고 지냈다. 우리 아이들은 녀자처럼 머리를 땋았다. 댕기도 드리우구. 그래 놓으니까 머리치장을 하면 녀자애인지 남자애인지 몰랐다. 아이들은 전부 그랬다. 로인들은 상투를 하구 망건을 쓰구 갓을 쓰구 했다.

그때 마을에선 집집마다 물레로 무명을 짰다. (일본놈들이 들어오기전에는 자급자족이었다.) 그리고 삼을 심어서 삼베옷을 해입었는데 그것이 여름에는 제일이었다, 시원한게. 우리 거기는 온대니까 겨울에 눈이 오면 높은 산을 내여놓구 벌은 다 녹아버렸다. 그래서 겨울에두 속옷 입는 법이 없었다.

우리 집은 오막살이집이였다. 광복난후에 가봤는데 그 오막살이집이 그냥 있었다. (32살먹던 해에 가봤다.) 그때 전기가 없다나니 산에 가서 광솔을 가져다 짜개서 불을 켰다. 벽옆에 굴뚝 비슷한걸 납작하게 만들어가지구 연기가 올라가게 하구 그랬다.

그리구 밥이란건 우리 거긴 보리를 많이 심어 보리밥이였는데 그게 참 근기는 있었다. 소화두 빨리 안되구 좋았다. 보리쌀하구 입쌀하구 섞어서 밥을 하면 고급이였다. 밥이 매끈매끈하구 제일이였다. 그리구 감자두 심었는데 땅이 좋으니깐 감자가 사발만큼이나 컸다.

산골짜기에다 벼농사두 좀 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으니 시내물이 있지 않겠는가? 그 시내가 번번한데다 구들들 같은것들을 놓구 그우에다 흙을 폈다. 그래가지구 거기다 벼를 심었다. 큰물이 안지면 그것 참 잘 먹었다. 그리구 펑퍼짐한 산우에다도 논을 만들었는데 논배미가 아주 작았다.

고생이 많았지만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다. 봄철이면 우리 형제는 바다에서 시내물루 올라오는 고기를 잡았다. 뱀장어두 있구 게따위두 있구 했는데 봄이면 알까러 올라왔다. 그걸 돌루 때려잡았다. 게란놈은 올라와서 돌바위밑에 붙든지 시내가 언덕밑에 붙든지 했다. 그걸 한마리래두 잡으면 그렇게 기뻤다.

없이 살다보니까 가을철이면 지주네 산에 가서 과일두 훔쳤다. 거 밤이 있잖는가. 거기 밤은 닭알같았다. 가을이 되면 털이 부시시한게 전부 가시천지였다. 익으면 쩍 벌어졌다. 짚신을 신구 형제간이 훔치는데 형이 따면 내가 받아넣었다. 그러다 지주령감이 보고 《이놈들–》 하면 숨었다가 또 훔치군 했다.

내가 일곱살먹던 해 10월달이였다. 길림성 류하현 삼원포에서 농사하던 어성인이란 사람이 우리 거기에 와서 중국 서간도로 가면 땅이 흔하구 농사도 잘되여 배불리 먹을수 있다구 하는것이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렇게 소개자로 나서서 농사군을 데리고 가는 사람은 지주한테서 소개비를 받아먹었다.) 그래서 우리 마을에서 여러 집이 그 사람을 따라 떠났다. 물건이라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중에 물을 먹어야 했으니 그저 바가지만 가지고 떠났다. 하두 구차하니 동네에서 모두 불쌍하다구 복판에 구멍 뚫린 일본돈을 한잎 두잎 모아 로비로 쓰라구 주었다. 

며칠 걸어 경상북도 안동을 지나서 김천에서 기차를 타구 서울루 왔다. 서울 와서 며칠 묵었는데 종로거리 려관에  들었다. 거기서 마침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했다. 술한 사람들이 거리에서 모두 다 나오라구, 만세를 부르자구 소리치는것이였다. 그때 우리 아버지두 나갔다. 모두들 만세를 부르는데 뒤에서 일본헌병놈들이 철갑모를 쓰구 말을 타구 칼을 휘두르며 막 찌르구 붙들구 하는것이였다.

서울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개성으로, 개성에서 평양, 신의주를 지나 중국에 왔다. 안동, 봉천, 사평, 신경을 거쳐 길림까지 와서 차에서 내렸고, 송화강을 건너 계속 걸었다. 로야령을 넘을 때 보니 겨울이 되여 눈이 쌓이구 한게 미끌어넘어져서 바가지를 깨구 한 일이 생각난다. 그땐 겨울이 참 추웠다. 로인들이 새벽에 밖에 나가면 수염에 고드름이 막 달리구 눈섭이 딱딱 붙구 그랬다.

이렇게 만주로 왔다. 그때 농사는 한국지주들 땅을 소작맡아 지었다. 그 지주들은 봄에 땅에 따라 량식을 주고 가을에 소출 절반을 받아내였다. 처음에 교하 황지강자(黃地岗子)에서 한 1년 일했다. 그러다가 농사가 잘 안되니 우림툰(烏林屯)이라는데로 이사를 갔다. 그때 우리는 한해 농사를 해보구 잘 안되면 다른데루 가구 하면서 자주 이사를 했다. 류랑생활이였다. 교하지구에서 거의 한 10년 살았는데 그 동안 이사를 한 대여섯번 했다. 황지강자, 우림툰, 륙도구, 소황리 이렇게 여러곳으루 이사를 다녔다. 그때 이사라는건 가마같은건 싹 두구 다녔다. 보따리두 없구 그저 빈몸에 다녔다.  새 고장에 가서 새로 구하거나 빌리여 썼다. 그땐 서로 빌려주길 잘했다. 돈주고 사는 법이 크게 없었다. 한족이구 조선족이구 백성들끼리는 서로 동정하고 도우며 살았다. 그때두 한족들이 조선족보다 저축을 잘했다. 그래서 많이는 조선족들이 한족들의걸 빌려쓰고 꿔쓰구 했다. 한족지주의것을 꿔쓰면 배로 물어줘야 했지만 백성들끼린 안 그랬다. 서로가 참 화목했다. 한족과 난 결의형제두 맺은 일이 있다.

그때 생활이라구야 말이 아니였다. 콩기름같은건 구경두 못했다. 참깨를 심구 들깨를 심구 해서 그 기름을 짜서 먹었다. 그리구 돼지를 잡으면 돼지기름을 먹구.

그래두 그때 교육열은 좋았다.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두 아이들을 공부시켜야 장차 출로가 있다는걸 알았던것이다. 그래서 이사를 해두 늘 학교있는데루 찾아가구 그랬다. 난 여덟살이 되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새벽과 저녁에 시간을 짜서 가르쳤다. 연필이구 붓이구 살수 없어 꼬챙이를 가지구 모래나 땅에다가 글을 썼다.

그때 우리 마을에 조선족선생이 두분 계셨는데 한분은 리춘화라 하구 다른 한분은 김무엇이던지 생각 안난다. 조선에서 망명해온 사람들이였는데 민족주의선전을 하는것이였다. 박성복이, 안병상이, 나 이렇게 댓이서 그 선생님들한테서 글을 배웠다. 그때 교과서는 한어로 된걸 가지구 배웠다. 서당 같은데서 하루에 댓시간씩 배웠다. 그리구 선생들에에 일년에 얼마간씩 벼를 줬댔다.

이렇게 배우다 들어보니까 조선에서 민족주의자들이 교하 소황리에 와서 학교를 꾸렸다는것이였다. 초급초학교, 고급소학교 다 있다구 해서 열살먹던 해에 거기 가서 입학시험을 쳤다. 입학하고보니 과연 합령전예비반,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그다음 고급소학교 1학년, 2학년 이렇게 다 있었다. 나는 천자문두 배웠구 또 후에 좀 더 배운게 있어서 직접 1학년에 붙었다.

후에 들어보니 그 학교는 원래 조선 민족주의자들이 길림성 류하현 삼원포라는 곳에 와서 세운것이였다. 후에 일본특무, 한간들이 자꾸 뒤를 따르구 하니깐 교하 소황리로 왔다는것이였다.

거기서 한 둬해 공부했는데 동만에 쏘련공산주의가 선전돼와서 교하에 전파됐다. 그래서 학교에서두 민족주의자들하구 공산주의주자들이 서로 반대파로 되여 쟁론을 하구 하다보니 후에 학교가 깨여지구 선생들이 막 밀려가구 했다. 그때 대부분 학생들이 공산주의를 숭배했다. 조직은 《주중청년동맹》(驻中青年同盟), 《길우(吉友)청년동맹》이 있었구 그밑에 소선대가 있었다. 나는 《길우련맹소년대》에 있었는데 이 조직에는 중대, 대대 이렇게 있었다. 하기에 우리는 열둬살때부터 공산주의가 인류를 해방한다는걸 알게 되였다. 그래서 절간에 가면 미션을 타파한다면서 부처 눈을 빼가지구 장난을 치기두 했다.

생활이 구차해서 소학교를 끝까지 못다니구 4학년에 중퇴를 했다. 그리구 집에서 일을 했다. 열서너살짜리가 일을 하면 얼마나 했겠는가. 힘은 들지 해는 길지 그래서 때로는 낚시대를 메구 가만히 강변으로 도망가서 고기두 잡군 했다. 그래두 많이 잡으면 부친이 좋아두 했다. 내가 열다섯살되던 해 우리 집은 화전의 북류수하자(北柳树河子)라는데로 이사갔다. 그런데 그곳 청년들이 날 보구 야학교 교원노릇해달래서 조선문을 가르치구 한어두 가르치구 수학두 가르쳤다.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저 그래선 안될것 같았다. 마침 황경찬이라구 친척이 있었는데 그가 소개해서 길림 7구 계림(鷄林)학교에 가서 고학을 했다. 논김이랑 매주구 하면서 품팔이로 학비를 벌었다. 그때 조선족들은 인품이 좋아서 공부를 한다니 지필묵이나 사 쓰라구 돈두 줬다. 그리구 또 학교서 상금두 타구 해서 보태 썼다.

그때 그 학교에두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가 있었는데 조선생이라구 민족주의자구 박선생, 한선생이 공산주의자였다. 내가 고급소학교 2학년에 들어선 해 5월에 학생들이 들구일어나서 교장을 쫓아내느라구 동맹휴학을 했다. 학생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해달라, 학생들에게두 신앙자유를 달라는것이였다. 그때 교장은 리관일이라구 민족주의자인데 독립군 중대장질두 했다. 그해 한 50됐을까 했는데 총두 가지구있었다. 후에 들을라니 관동군 특무가 됐다는것이였다. 그 사람이 학교서 늘 공산주의를 반대했다. 학생들보구 너희들 쓸데없이 공산주의를 신앙해서 뭘 하는가, 학생은 공부나 해야지, 나라 없는놈이 나라나 구해야지 그때위를 신앙해서 뭘 하느냐고 했다.

동맹휴학때문에 나까지 일곱이 학교서 쫓겨났다. 할수없어 집에 돌아와 다시 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후 고생한 일이야 어찌 한입으루 다 말하겠는가!

광복이 될무렵엔 또 도박풍이 매우 심했다. 리형건이라구 황해도 심천사람인데 나하구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다. 아, 이 사람이 글쎄 어찌 통이 큰지 한번 하면 벼 댓섬씩 들이밀었다. 그래 그걸 알고 그 집 모친이 어느날 나를 찾아와서 한 7리되는데를 함께 갔다. 가보니 판을 벌리고있었다. 전라도놈하구 붙었는데 그놈이 한창 눈에 달이 올라있었다. 그래 내가 놀지 말라구 말리니깐 그 전라도놈이 주먹으루 내 가슴을 툭 쳤는데 그 미열루 한 3년 고생했다. 그땐 경찰놈들까지 다 그 노름에 동원된판이라 정말 한심했다.

그해에 광복이 났다.

(북경대학 리동희 정리)

*글의 맞춤법과 표기는 원문 그대로 두었다. (굵은 글씨, 밑줄과 줄바꿈은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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