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오후, 401호 강의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엊그제 밤, 화실의 어둠 속에서 현수와 몰래 와인을 나눠 마시며 느꼈던 그 은밀한 해방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지도교수인 박 교수의 낮은 목소리와 프로젝터 팬 소리만이 감도는 강의실은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화면에는 예린이 지난 학기 동안 제출했던 평소의 습작들이 슬라이드로 넘어가고 있었다. 완벽한 비례의 정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석고 소묘, 그리고 매끄럽게 마감된 풍경화들.
예린은 강단 옆에 서서 습관처럼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아 쥐었다. 작업용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자세는 마치 훈계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지나치게 바르고 경직되어 있었다. 자신의 그림이 스크린에 뜰 때마다, 마치 벌거벗겨진 채 심판대에 선 기분이었다.
"장예린 씨."
박 교수가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예린을 응시했다.
"북경 명문 미대 수석 졸업생답군. 기술적으로는 더 가르칠 게 없어. 구도, 색채, 마감… 기계처럼 완벽해."
칭찬인 줄 알았던 목소리는 이내 서늘한 칼날로 변해 날아왔다.
"그런데 말이야, 이 그림들엔 장예린이 없어요. 붓질 하나하나가 너무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워. 마치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린 그림 같단 말이지. 이건 예술이 아니라, 아주 잘 훈련된 방어기제야. 자네, 캔버스 뒤에 숨어서 뭘 감추고 있나?"
강의실 안의 시선들이 예린의 꼿꼿한 뒷모습에 꽂혔다.
예린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앞으로 모아 쥔 손가락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렸다. 다른 학생들의 손처럼 물감으로 얼룩지거나 거칠어지지 않은, 지나치게 희고 매끄러운 손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북경의 부유한 시댁에서 우아한 며느리로 살기 위해, 그리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정답만을 가르치는 교사로 살기 위해 철저히 관리해온 흔적이었다.
한국의 비평 수업은 작품의 완성도보다 작가의 태도를 발가벗기는 데 더 잔인했다. 손끝에 남은 그 안락한 생활의 증거마저 들킨 것만 같아 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맨 뒷자리에는 현수가 앉아 있었다. 쏟아지는 오후 햇살을 등지고 삐딱하게 턱을 괴고 앉은 그는, 특유의 건강한 피부톤과 뚜렷한 이목구비 덕분에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교수들 사이에서도 물건이라 불리며 편애를 받는 그였다.
"거기, 현수 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박 교수가 현수를 지목했다.
"화실에서 예린 씨 작업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을 텐데. 자네 눈에도 이 그림이 그냥 잘 그린 정물화로만 보이나?"
박 교수의 질문에 예린의 어깨가 움찔했다. 현수가 천천히 입을 뗐다.
"교수님 말씀대로 지독하게 폐쇄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단순히 숨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수의 시선이 스크린 속 예린의 정갈한 그림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저 매끄러운 붓질들은 문을 닫는 게 아니라, 안에서 터져 나오려는 걸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빗장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되는 것들이 쏟아질까 봐, 덧칠하고 또 덧칠해서 박제해버린 거죠. 그래서 슬퍼 보입니다. 저 완벽함이."
현수의 말은 엊그제 밤 두 사람이 낮게 속삭이며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화풍이 가진 본질적인 결핍을, 그러나 그 이면의 필사적인 노력까지 꿰뚫어 보는 그의 목소리에 예린은 수치심과 함께 묘한 전율을 느꼈다.
수업이 끝난 후, 예린은 휘청거리는 마음을 안고 다시 307호 화실을 찾았다.
현수는 어느새 먼저 와서 지난밤 엎질러진 테레빈유와 흐트러진 물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예린이 들어오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왔어요, 누나?"
비평 수업의 차가운 공기는 사라지고, 다시 화실 특유의 부드러운 누나라는 호칭이 정적을 흔들었다. 예린은 대답 대신 100호 크기의 거대한 백색 캔버스 앞에 섰다. 이제 곧 시작해야 할 경연 출품작의 빈 화면이었다.
텅 빈 하얀 공간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거대한 설원처럼 느껴졌다. 예린은 목탄을 집어 들었지만,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교수님의 혹평과 현수의 지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북경 스타일의 완벽하고 안전한 기교로 승부할 것인가, 아니면 현수가 보여준 저 파괴적인 에너지처럼 나를 깨부수는 파격을 시도할 것인가.
"손이 안 움직입니까?"
현수가 어느새 예린의 등 뒤로 다가와 섰다. 엊그제 와인을 건넬 때처럼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무서운 게 당연해요. 지금까지 누나를 지켜주던 그 우아한 껍데기를 벗어던져야 하니까."
"현수 씨… 난 현수 씨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물감을 던지는 사람은 못 돼요. 내 손은 이미 정교하게 다듬고 덧칠하는 것에 길들어 버렸어요. 십수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을까요?"
예린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괴감이 서려 있었다. 현수는 주머니에서 꺼낸 창백할 정도로 깨끗한 예린의 손가락 마디를 빤히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
"누나의 그 기교, 버리지 마요. 그건 누나만의 무기니까. 다만 사용법을 바꾸면 됩니다."
"사용법요?"
"지금까진 감추기 위해 덧칠했잖아요? 이젠 드러내기 위해 쌓아봐요. 누나가 가진 그 집요한 묘사력으로, 누나 안의 가장 추하고 아픈 기억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거예요. 소리 지르는 것보다, 침묵 속에서 빤히 쳐다보는 게 더 무서운 법이니까."
현수의 조언은 예린이 고민하던 갈림길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북경의 기교와 한국의 진실. 자신을 옭아매던 그 꼼꼼한 붓질로,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증명해 보이는 것. 그것이 현수가 말하는, 그리고 예린이 가야 할 새로운 화풍이었다.
예린은 다시 캔버스로 몸을 돌렸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북경의 우아한 장예린도, 현수를 흉내 내는 가짜 장예린도 아니었다. 그녀는 두 세계의 충돌을 캔버스 위에 기록해야 할 유일한 목격자였다.
"비명… 그래요, 소리 없는 비명."
예린이 숯펜을 캔버스에 거칠게 눌렀다.
끼익-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첫 번째 선이 그어졌다. 그것은 매끄러운 곡선이 아닌,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수직선이었다. 마치 감옥의 창살 같기도 하고, 찢어진 상처 같기도 한 선.
"계속해봐요. 내가 뒤에서 보고 있을 테니까."
현수가 뒤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그녀를 지켰다. 예린은 이제 막 시작된 이 선들이 결국 자신의 어떤 치부를 까밝히게 될지 두려웠지만, 동시에 멈출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캔버스 위의 검은 선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예린의 손끝을 타고 서서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