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을 받은 영광의 여운은 잔물결처럼 금세 잦아들었으나, 그 뒤에 남은 침묵은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끈적했다. 307호 화실의 공기는 이제 날카로운 테레빈유 향기뿐만 아니라,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팽팽한 인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린과 현수는 각자의 이젤 앞에서 붓을 움직였지만,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캔버스 위의 형상이 아니었다. 창백한 형광등 아래서 서로의 숨결이 섞이던 순간, 현수의 투박한 온기가 전해주던 생경한 해방감. 평생 억눌러왔던 비명이 안도감으로 변해 흩어지던 그 밤의 잔향이, 마르지 않은 유화 물감처럼 생각의 가장자리에 끈질기게 묻어있었다.
이미 선을 넘은 예린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담담해져 있었다.
왕펑에게서 오는 메시지는 읽히지 않은 채 화면 아래로 밀려났다. 시어머니가 북경의 용하다는 중의에게서 거금을 들여 지어 보냈던 강신난궁방(降神暖宫方) 중약 상자는 화실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캔버스 높이를 맞추는 받침대로 전락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북경의 삶을 이제 어디쯤에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무언의 시위였다.
왕펑의 다정함이 유리 진열장 속에 봉인된 안정이었다면, 현수와 나눈 시간은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물감의 세례에 가까웠다. 계산되지 않았고, 정제되지 않았지만, 분명 살아 있었다.
예린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가능성에서 제외해 왔다. 병원에서 들었던 말들, 번번이 무너졌던 기대들, 그리고 그 실패 위에 덧씌워진 수많은 해석들. 그것들은 차곡차곡 쌓여, 그녀로 하여금 어느 순간부터 ‘조심해야 할 미래’ 자체를 상상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날의 온기는, 막아야 할 무엇이 아니라 되살아난 감각 그 자체로만 남아 있었다. 경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이젠 동기이면서 더욱더 가까워진 현수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이, 그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든 유일한 위로이자 안식이었다. 더 이상 은밀한 신호나 거창한 핑계는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나란히 걷는 그 뒷모습은,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계절이 천천히 기울어가던 어느 늦가을 아침이었다.
예린은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균열을 감지했다. 늘 일정하던 리듬이 어긋나 있었고, 이유 없이 숨이 가빠지는 날이 잦아졌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전시 이후의 피로, 밤샘 작업, 쌓인 긴장감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동안 북경에서 그토록 간절히 원하며 온갖 비방을 다 써보았을 때도 비웃듯 침묵했던 몸이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라 믿는 편이 훨씬 익숙했다.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순간이었다.
“우욱…”
늘 맡아오던 테레빈유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찰나, 속이 뒤집히는 듯한 울렁임이 치밀어 올랐다. 예린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향했다. 한참을 세면대에 기대 서서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거울 속의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했다.
그날 이후, 사소한 변화들이 겹쳐졌다. 옷깃만 스쳐도 가슴께가 묵직하게 당겼고, 이유 없는 졸음이 작업의 흐름을 끊어놓았다. 붓을 쥔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는 날도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예린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물감 얼룩이 묻은 작업복 앞주머니를 더듬었다. 손끝에 바스락거리는 낯선 종이봉투가 닿았다.
언제였더라. 며칠 전, 홀린 듯 약국에 들렀다가 사서 넣어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테스트 키트였다.
화실 화장실의 형광등 아래, 예린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지나치게 또렷하게 울렸다.
얼마 후, 그녀는 세면대를 붙잡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거울 속의 예린은, 기다림이 끝났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북경의 명의들도, 시어머니가 구해왔던 수많은 처방들도 해내지 못한 일이 이곳에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벌어졌다는 사실이 현실감을 잃고 떠올랐다.
순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몸의 변화에 대한 환희라기보다는, 지난 3년의 세월에 대한 끔찍한 배신감이었다.
입안에서 그 쓰디쓴 중약 냄새가 다시 맴도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구역질을 참아가며 억지로 삼켜야 했던 그 검고 끈적한 액체들. “너는 밭이 말라서 씨를 못 품는다”며 혀를 차던 시어머니의 서늘한 눈빛. 자신을 죄인 취급하며 동정하던 왕펑의 가식적인 다정함까지.
그들은 멀쩡한 여자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그녀가 삼켰던 것은 약이 아니라, 그녀를 옭아매고 병들게 했던 ‘거짓말’들이었다.
‘나는… 멀쩡했어. 처음부터 나의 문제가 아니었어.’
스스로 메말라버린 폐허라고 믿었던 자신의 몸. 잘못된 처방과 억압 속에 갇혀 숨죽이고 있었을 뿐.
그 잔인한 진실을 깨닫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묘한 희열이 스쳤다.
하지만 그 짧은 희열은 곧 거대한 공포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거울 속의 여자는 웃고 있는 동시에 울고 있었다. 이 변화는 축복인 동시에 파멸의 씨앗이었다. 시댁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녀를 부정한 여자로 몰아세우며 사회적으로 매장하려 들 것이다. 왕펑과의 이혼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닥쳐온 몸의 변화는 그 계획이 아직 준비 없는 그녀에게 시간을 독촉하는 촉매가 되면서 발목을 잡는 가장 치명적인 족쇄가 될 수 있었다.
‘어떡하지… 이제 정말 어떡하지?’
예린은 거울 속의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공포와 분노,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환희가 뒤섞인 혼돈의 얼굴이었다.
이 변화는 과거의 삶과는 닿아 있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가 넘은 선이 남긴, 가장 분명하고도 위험한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화장실 문밖에서 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안에 있어? 우리 저녁 먹으러 가자. 오늘은 좀 일찍 끝내.”
예린은 흠칫 놀라 테스트 키트 플라스틱을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억지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화장실 문이 열리자마자 화실의 공기가 다시 훅 밀려들어 왔다.
“욱…”
그 순간,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화실 특유의 기름 냄새가 다시 한번 예린의 코끝을 찔렀다. 예린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막았다.
문 앞에 서 있던 현수가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누나? 왜 그래? 어디 아파?”
현수는 예린의 창백한 얼굴과 식은땀을 보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으려 했다. 그녀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알 리 없는 그 다정한 손길이, 지금 예린에게는 불에 덴 듯 뜨겁고 무섭게 느껴졌다.
예린은 살짝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애써 덤덤한 척 힘겹게 입을 뗐다.
“…잘 모르겠어. 요새 좀… 많이 피곤하네.”
“전시회 끝나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봐. 얼굴이 백지장이야.”
현수의 순수한 걱정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예린은 주머니 속의 차가운 플라스틱을 꽉 움켜쥐었다.
“아니야,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예린은 현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거울 속의 여인은 더 이상 혼자만의 세계에 머무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말해지지 않은 비밀을 품은 채,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서 있었다.
이 문을 나서면, 그녀의 삶은 벽에 걸린 <갈망>보다 더 잔혹하고 파격적인 캔버스로 변해갈 것임을, 예린은 설명할 수 없는 확신으로 알고 있었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