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진국제공항에 내리자, 서울과는 또 다른 질감의 냉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습기 없이 바싹 마른,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었다.
예린은 옷깃을 여미며 탕산행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창밖의 풍경은 빠르게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1시간 남짓의 짧은 이동이었지만, 예린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탕산역에 내리자 매캐한 석탄 냄새와 흙먼지가 코를 찔렀다. 하늘은 언제나처럼 뿌연 스모그에 갇혀 있었다.
예린은 택시를 잡아타고 익숙한 주소를 댔다. 목적지는 탕산 시내에서도 한참 벗어난 구예구(古冶区)의 구석진 동네였다. 이곳은 과거 탄광과 공업으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자원 고갈로 쇠락해가는 노후 광산 지역이었다.
택시가 잘 닦인 대로를 벗어나자, 검은 석탄 가루가 내려앉은 낡은 단층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가가 나타났다. 차체가 덜컹거릴 때마다 예린은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던 서울이나, 24시간 보안요원이 지키는 북경의 최고급 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세상. 거칠고, 투박하고, 무엇보다 척박한 땅.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진짜 현실이었다.
택시는 칠이 다 벗겨진 붉은 벽돌의 1층짜리 단독주택 앞에 멈췄다. 담장 곳곳에는 금이 가 있었고, 지붕 위에는 검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이 집이, 지금 그녀에게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예린은 굳게 닫힌 철대문 앞에 섰다.
쾅, 쾅, 쾅.
“…누구세요?”
안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끼이익 하고 무거운 철문이 열렸다.
“…!”
문을 연 여자가 역광에 눈을 찌푸리더니,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린린이니?”
엄마였다. 하지만 예린의 기억 속에 있던 억척스럽고 당당하던 엄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난 5년, 중풍으로 쓰러진 남편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밤낮으로 간호하느라 엄마는 바짝 마른 장작처럼 변해 있었다. 퀭한 눈, 푹 꺼진 볼, 염색할 겨를이 없어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
그 초라한 모습이 가슴을 쳤다. 그녀가 화려한 감옥에서 비싼 옷을 입고 불행을 연기할 때, 엄마는 이곳에서 진짜 고통과 싸우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엄마…”
예린은 엄마의 거친 손을 잡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쿰쿰한 약 냄새와 오래된 곰팡내, 그리고 환자 특유의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훅 끼쳐왔다.
아랫목에는 아빠가 앙상한 뼈만 남은 채 누워 계셨다.
“아빠… 저 왔어요. 린린이 왔어요.”
예린이 아빠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 남자가 누구였던가. 거친 탕산의 공사판과 공장을 전전하며,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 집안의 유일한 경제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가장이었다. 고된 노동에 손마디가 다 휘어지면서도, 외동딸인 예린이가 그림을 그린다 하면 “우리 린린이는 천재다, 내 자랑이다” 하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던 딸바보 아빠였다.
그토록 강인하고 든든했던 태산 같던 아빠가, 지금은 스스로 몸 한 번 뒤집지 못하고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는 힘없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으… 어…”
아빠의 눈동자가 천천히 예린에게로 향했다. 입이 돌아가 말은 하지 못했지만, 딸을 알아보는 듯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왔느냐… 내 딸… 내 자랑…’
그 무언의 눈빛이 예린의 가슴을 후벼 팠다. 예린은 떨리는 손을 뻗어, 땀에 젖어 이마에 붙은 아빠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앙상해진 아빠의 손을 잡았다.
“죄송해요… 자주 못 와서 죄송해요, 아빠. 제가 불효녀예요.”
예린은 아빠의 손등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흐느꼈다. 아빠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예린의 손등을 톡, 톡, 건드렸다. 울지 말라는 듯한, 투박하고도 서러운 위로였다.
잠시 후, 건넌방으로 자리를 옮긴 예린은 외투 주머니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꺼내 엄마 앞에 내려놓았다. 서울에서 가져온 유일한 짐이었다.
“이게 뭐냐? 갑자기 연락도 없이 와서는…”
엄마는 영문을 몰라 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 선명한 두 줄.
“엄마, 나… 임신했어.”
순간, 엄마의 수척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뭐? 아이고, 세상에! 드디어! 왕 서방네가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드디어 소원을 풀었구나! 여보! 들었어요? 우리 린린이가 해냈대요!”
엄마는 뛸 듯이 기뻐하며 벽을 향해 소리쳤다. 지난 3년, 귀한 외동딸이 아이를 못 낳아 시댁에서 구박받는다는 소식에 피가 마르던 엄마였다. 하지만 예린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아니야, 엄마. 기뻐하지 마.”
“…응?”
“이거… 왕펑 아이 아니야.”
엄마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왕펑, 아이 못 가져. 무정자증이래. 3년 전부터 알고 있었대.”
“그…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럼 그동안 네가 불임이라고 구박받고, 그 쓴 약을 사발로 들이켰던 건…”
“다 쇼였어. 자기들 자존심 때문에 나를 병신 만들어서 방패막이로 쓴 거야. 3년 동안… 날 속였어.”
친정엄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이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바닥을 쾅 내리쳤다.
“이 천하에 죽일 놈들! 짐승만도 못한 것들! 내 귀한 딸을 3년 동안이나…!”
엄마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가난 때문에, 아빠가 쓰러진 뒤 병원비 때문에 딸을 부잣집에 팔려가듯 시집보냈다는 죄책감. 그리고 그곳에서 금지옥엽 외동딸이 겪었을 기만과 수모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한바탕 울음을 토해낸 엄마가 붉어진 눈으로 바닥에 놓인 테스트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 아이는… 누구 거냐?”
예린은 고개를 숙였다.
“…서울에서 만난 사람이야. 나를 사람으로 대해준 유일한 사람.”
정적이 흘렀다. 시골집의 낡은 벽시계 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엄마는 예린의 배를,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공포로 물들었다.
왕씨 집안은 북경에서도 손꼽히는 권력가였다. 반면 이곳 구예구의 낡은 단층집에 사는 자신들은 힘없는 서민일 뿐이었다. 그들이 아들의 불임을 숨기기 위해 며느리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며느리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배서 돌아왔다는 사실. 이 두 가지가 만나는 순간 벌어질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덮기 위해 예린을 사회적으로 매장할 것이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끝까지 추적해 그 남자의 인생까지 철저히 짓밟을 것이다.
친정엄마가 예린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병수발로 거칠어진 엄마의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린린아, 잘 들어라.”
엄마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것은 딸을 살리기 위한 어미의 비장함이었다.
“이 아이, 낳으면 안 된다.”
예린의 어깨가 움찔했다.
“너 살고 싶으면, 그리고 그 남자 살리고 싶으면… 여기서 끝내야 해. 왕씨네 귀신들이 알면 너도 죽고 그 청년도 죽어. 네가 불임이라는 거, 걔네들이 만들어준 알리바이잖아. 그걸 이용해야 해. 넌 끝까지 아이를 못 낳는 몸이어야 해.”
“엄마… 흑…”
“내 친구 중에 구예구 병원에서 산부인과 하는 이모 알지? 입 무거운 사람이야. 내일 날 밝는 대로 바로 가자. 아무 기록도 안 남게 해달라고 빌어야지. 금방 끝내 줄 거야.”
엄마가 와락 예린을 끌어안았다.
“아이고, 내 새끼… 불쌍해서 어쩌니… 이 어미가 죄인이다. 내가 돈이 없어서, 내가 못나서 널 그런 지옥에 밀어 넣었어.”
“엄마… 으흐흑… 엄마…”
예린도 엄마의 목을 끌어안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3년 만에 맡는 엄마의 냄새. 흙내와 땀 냄새가 섞인 그 투박한 품에서 두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방 안에 가득 찬 통곡 소리가 탕산의 메마른 밤공기를 갈랐다.
예린은 흐려지는 눈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서울의 그 작은 화실에서, 캔버스 냄새와 커피 향기 속에서 나누었던 우리의 뜨거웠던 사랑. 그 예고 없이 찾아온 기적 같은 결실.
하지만 이 생명은 축복받으며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현수와 단 한마디 상의도, 토론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알리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을 걸고 이 아이를 지키려 들 테니까. 그러면 현수가 위험해 진다.
‘그러니까, 사랑하니까… 지워야 해.’
이것은 그녀 혼자 짊어져야 할 형벌이었다. 현수를 살리기 위해, 예린은 가장 잔인한 선택을, 가장 은밀하게 내려야만 했다.
“…응, 엄마. 내일 가자.”
예린은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낡은 창호지 문밖으로 구예구의 매서운 먼지바람 소리가 윙윙거렸다. 오늘 밤은 아주 길고도 참담한 밤이 될 것 같았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