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徐京植). 1951년 일본 교토시 재일조선인 부모 사이 4형제 중의 막내로 출생. 와세다대학 문학부 졸업. 도쿄경제대학 법학부 교수. 두 형은 서울에서 유학 중에 재일조선인 신분으로 인한 사건 때문에 1971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을 선고받아 투옥되었다가 1990년에 되어서야 모두 석방됨. 줄곧 경계에 있는 자와 외면받는 자에 대한 고민과 문필활동을 이어옴.

글ㅣ서경식
번역ㅣ평강

○우리 망명자들

우리들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엄청 해대다가도, 전혀 예상치 못하게, 집에 가서는 가스밸브를 틀거나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리거나 하는 기묘한 낙천주의자들이 있다. 우리들이 선언했던 쾌활함이란 것이 당장이라도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는 위태위태한 것이라고, 우리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중략) 망명자는 항상 싸우는 대가로, 또는 어떡하면 저항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대가로, 지인과 친척들의 죽음을 바라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때문에 누군가가 죽으면, 그 사람은 이미 어깨 위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진 것이다, 라고 쾌활하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汉娜·阿伦特, Hannah Arendt)는 <우리 망명자들>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차별받는 자로서의 유대인』).

한나 아렌트

글 중의 ‘우리’는 제2차세계대전 중에 나치의 손에서 탈출하여 미국에 체류하는 유대인 망명자들을 가리킨다. 아렌트는 ‘신분상승’을 지향하는 ‘동화[同化] 유대인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하이네(海涅, Heine), 라헬 바른하겐(Rahel Varnhagen), 베르나르 라자르(Bernard Lazare), 프란츠 (卡夫卡, Franz Kafka) 등 의식적으로 ‘차별받는 자’(pariah)의 위치에 섰던 선인들의 삶의 방식을 상기하도록 호소한다.

나는 아렌트의 논지에 깊이 공감한다. 나 자신이 '차별받는 자임을 의식하는’ 자로써 살 것을 나에게 요구하여 왔다. 그러나 그 생각과는 별도로, 아렌트가 비판하는 경향이 나의 주변에, 혹은 자칫하면 나 자신 안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일조선인(혹은 자이니치[在日])의 자살률은 일본인보다 높을 것임이 틀림없다. 통계적인 수치는 모르지만, 나는 이 점에 대해 거의 확신하다시피 한다. 활동적이고 적응력이 강하다는 이미지가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사회의 인식의 전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만, 나 자신의 인상은 정반대이다. 자살한 재일조선인 친구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봐도,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 슬프도록 엷은 미소를 짓거나,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뚝- 하고 스위치를 꺼버리 듯 사라졌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런 죽음과 마주했을 때, 내 마음속에 나타나는 감개는, 말로 잘 표현이 안되지만, “그래, 역시나.” 하는 기분에 가깝다. “그 사람은 이미 어깨 위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진 거야” 라고 생각하고 싶은 아렌트의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나에게는 재일조선인이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부조리한 경험을 자학적인 농담으로 바꾸는데 능란한 지인이 있다. 나는 그것을 농담조로 “자이니치의 유대인 조크”라고 부르고 있다. 농담의 주제는 대부분 재일조선인의 실상에 대한 일본 주류사회의 무지함과 몰이해다. 그러나 그 조크는 주류에 대해 웃어넘기는 것보다는, 사소하고 자잘한 일들에 상처받는 자기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비웃음으로 끝을 맺기가 일쑤다. 그러한 농담으로 겨우겨우 삶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즉흥적이면서도 재치있는 농담을 연발하면서 서비스 정신의 화신이라도 된 듯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들 실컷 웃겨주는 그 지인을 보고 있노라면, 함께 배를 끌어안고 웃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찾아오는 불안감을 느낀다. 이 사람, 오늘 저녁 자기 집에 들어가서는 느닷없이 목을 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불행히도 그런 생각이 현실로 되었다면, 나로서는 슬픔이나 분노하기에 앞서 “그래, 역시나.” 하고 납득 비슷한 감정이 머리를 쳐들 것임이 틀림없다.

○일본인의 얼

몇 년 전, 증권회사에 부적절한 이익공유를 요구하였다는 의혹 때문에 추궁을 받은, 아라이 쇼우케(新井将敬)라고 하는 국회의원이 자살하였다. 그는 1948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이었다. 본래 이름은 박경재(朴景在)였지만 고등학교가 끝날 즈음에 귀화수속을 밟고 일본국적을 취득하였다. 오쿠라쇼(大蔵省, 일본 재정부)의 관료로 출발하여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 오쿠라 대신(재정부장)의 비서관을 지내고 중의원 의원으로 입후보되었지만, 선거 직전이었던 1982년 11월에 ‘검은 딱지 사건’이 터졌다. 같은 선거구의 후보였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의원의 비서가 그의 선거홍보 포스터 3천 장에 ‘북조선으로부터 귀화’라는 딱지를 붙인 사건이다. 

‘검은 딱지 사건’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아라이 씨는 그 해 낙선되었다. 하지만 1986년에 재도전하여 결국 당선되었으며, 그 후 자민당의 젊은 개혁파 논객으로서 매스컴의 은총을 받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 그가 지방 검찰원의 사정청취를 받은 후, 어이없게도 도쿄의 모 호텔에서 자살하였던 것이다. 

애초에 아라이 씨는 의학부 진학의 목표를 가졌었다. 그 시험에서 실패하고 나서는 일본국적을 취득하고 도쿄대학 이과 제1유형에 합격하였으며 후에는 경제학부로 소속을 옮겼다. 졸업 후, 일단은 신일본제철회사(新日鉄)에 입사하였지만 재직 중에 국가공무원상급시험에 합격하여 오쿠라쇼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귀화 후에는 대기업을 거쳐 오쿠라 관료로 된 그의 커리어는, 일본국적이 없어도 의사는 될 수 있지만 국가공무원은 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모른다면, ‘화려한 변신’이라는 잘못된 칭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라이 씨의 인생은 신분상승을 지향했던 충실한 실천 과정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마이너리티(소수자) 삶의 한 전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자민당의 대표로 모 거물급 의원이 일본역사의 뛰어난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와카[일본 전통 정형시]를 인용하여 추도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야마토(일본)의 얼을 누군가 묻는다면/아침해에 싱그러운 산벚의 꽃이어라.
    (しき島の 大和心を 人とはば 朝日ににほふ 山さくら花)

고인이야말로 ‘일본인(야마토)의 얼’을 지닌 자였다, 그리고 일본인답게 깨끗한 죽음을 택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아라이 씨가 ‘일본인이 되려고 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본인’이란 것에 의문을 품지 않는 주류로서는 ‘일본인이 되겠다’고 노력할 필요 자체가 없지 않은가. 일본사회의 주류로부터 배척받고 있다는 의식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신분상승을 지향하고 시종일관 노력했을까. 그가 지녔던 것은 ‘일본인의 얼’이 아니라 ‘마이너리티의 얼’이었다. 끝까지 그의 죽음마저도 이용했던 것은 주류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박일, <살고 사랑하고 그리고 죽었다 –- 아라이 쇼우케의 유언장>(일본어),『호르몬 문화 8』新幹社 참조). 

나는 아라이 씨의 삶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생각이 없다. 만약 그의 생전에 서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할지라도 아마 친구까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자살에 대해 “그래, 역시나.” 하는 납득과 비슷한 기묘한 감개의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일본사회가 아라이 씨의 죽음을 다루는 방식의 일단

의혹사건으로 아라이 씨보다 훨씬 더한 추궁을 당한 의원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자살한 것은 항상 그들의 비서 같은 사람들이었지 본인이 자살한 예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의혹을 받은 의원들은 중앙정계에서는 얼마나 비난을 받았든, 지역과 고향에 내려가서는 삭발하고 머리끈을 질끈 동인 채로 길거리에 나서서 연설과 사죄 행각을 벌이면서 재기를 기약한다. 반대로 그런 모습들은 지역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 대도시에서 상처입고 돌아온 마을의 아들을 맞아들여서 치료해 주고 응원해 주고 재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유죄든 실형선고든 쉽게 내팽개치지는 않는다. 그에 비해서 아라이 씨의 자살은 너무나도 나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에게는 돌아갈 ‘마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됐어, 이제 이쯤에서 끝낼까 부다, 그런 생각으로 ‘죽음’을 향해 한 발 내디디려고 몸을 기울이는 순간, 와락 뒷머리채를 움켜쥐고 끌어당기는 가장 중요한 힘의 하나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국민’이라는 관념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향과 풍토, 자신을 아껴주는 가족,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형무형의 자산, 부모로부터 자녀에로 전해지는 혈통, 과거에서 미래에로 이어지는 ‘국민’의 전통, 고유한 역사와 문화. 하나하나 꼼꼼하게 검토해보면 근거가 빈약한 이런 여러 가지 관념들이 단단하게 하나로 꼬아진 그것이 바로 ‘국민’이다. 

그리하여, 죽은 친인들에게 미안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쌍하다, 라고 하는 개개인의 생각이, ‘가족’, ‘향토’, ‘모교’, ‘우리 회사’, ‘우리 마을’ 등을 경유하여 ‘국가’와 ‘국민’에까지 귀결된다. 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개인의 생각이 ‘국민’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에로 회수되는 걸까. 여기서는 비논리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논리를 따지는 분야가 아닌’ 것이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며, 그것을 모르는 놈은 ‘국민’이 아닌 것이다. 무적의 논리가 아닌가.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 라고 불상사에 대해 사과하는 정치가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기 위하여’ 라는 이유를 대면서 사직도 자살도 하지 않은 채 현직과 현세에 자리를 굳히고 눌러앉는다. ‘국민’이라는 관념이 그들의 뒷머리채를 꽉 움켜잡고 있는 것이다. ‘국민’이라는 틀로부터 추방된 디아스포라의 경우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아주 최근에야 ‘국민’의 틀에 편입된 새로운 참여자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해 보인다. 아라이 쇼우케의 경우가 그렇다. 

○죽은 자의 국민화 

여기서 잠깐, 재일조선인이 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거기서는, 사람은 죽음의 관념과 장례식 의례를 통하여 ‘국민’에 수렴된다는 것, 그 사실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나의 부모님은 모두 1920년대에 태어난 자이니치(在日) 1세다. 1세라고 하지만 어릴 적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2세에 가까우며, 태어난 고향과의 연결고리도 그만큼 약했다. 아버지는 죽으면 고향에 묻어달라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있지만 그것마저도 애매모호한 요구여서 구체적인 지시까지는 남기지 않았다. 어머니의 경우는 무덤을 어떻게 하라는 희망사항을 얘기한 기억 자체가 없다. 1980년에 어머니가, 그리고 83년에 아버지가 잇따라 세상을 떴을 때, 우리 남은 유족들은 후사를 어떻게 해야 될지 아무도 몰랐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게다가 형들이 아직 투옥 중(북한에 한번 다녀왔단 사실 때문에 한국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이었던 당시로서는, 부모의 유골을 한국에 모시고 가서 묻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별로 걱정할 겨를도 없이, 어디서 소식을 주워들었는지 모르는 상조서비스 회사 직원이 달려왔다. 그가 맨 처음 물어본 것은 “종파는 어딘가”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 대부분은 불교도가 아니며 따라서 종파나 단가[檀家, 가문이 대대로 다니는 절] 등을 물어도 당혹할 수밖에 없다. 

뒤이어 물은 것은 “계명(戒名)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것이었다. “그런거 없다”고 대답하니, “계명과 위패가 없는 장례식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라고 한다. 음… 하고 고민하고 있자니, “30만엔, 50만엔, 100만엔 짜리가 있습니다만, 값싼 걸로 하나 정하시는게 어떻습니까…” 라고 하면서 임시로 계명을 지을 것을 추천한다. 

그다음에는 “가족 문양(家紋)은요?” 라고 하기에 “조선인은 가족 문양 같은 거 없다”라고 대답하니, “그러면 이걸로 합시다” 라고 하면서 카탈로그 같은 물건을 펼쳤다. 가족 문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임시방편으로 쓸 수 있는 가족 문양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일이 거절하기에는 확고한 방침과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유족은 지쳐있고 쇼크로 인해 내버려 두기 때문에 결국은 얼렁뚱땅 비용을 지불하고 상조회사 측에서 알아서 하게 놔둘 수밖에 없다. 

“묘지는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묻기에 아무런 준비도 없다고 대화가 끊겨버리자, 그러면 이것도 묘비가게에 연락하여 해결해 주겠다고 한다. 일이 이쯤 되면 오히려 뭐든 척척 처리해 주는 상조회사에 고마워해 줘야 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후에 돌이켜 봤을 때, 나는 이 모든 절차를 “죽은 자의 국민화”라고 이름짓게 되었다. 절대 대부분의 일본인은, 자신이 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포함하여, 이러한 절차에 아무런 불편한 감정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장례와 무덤의 문제를 초월한 경지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사실은 공동체에 의한 장례식 의례를 통하여 ‘국민’으로 통합되기 때문이다. 우리 재일조선인들은 자신이 그 틀에서는 삐어져 나온 존재였음을, 죽고 나서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아다시노 염불사

부모님의 무덤은 교토의 아다시노(化野) 염불사(念佛寺)에 있다. 거기에 묻은 제일 중요한 이유는, 예로부터 무주고혼(無主孤魂)들을 묻어온 절간이라서 단가(檀家)가 아닌 자나 불교도가 아닌 자들도 너그럽게 묘지에 받아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무조고혼으로 인정되어서 절의 묘지에 묻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곳에는 재일조선인들의 무덤들이 아주 많다. 모두가 우리 가족과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이다. 묘비의 형식 또한 들쑥날쑥하다. 많은 경우에는 묘비의 정면에 고인의 일본식 이름이 적히고 측면에는 조선의 출신지와 본관이 새겨져있다. 본관은 가족의 발상지이다. 죽은 뒤의 묘비명에까지 일본 이름이란 건 슬픈 일이지만 적어도 측면 정도는 자신의 뿌리를 새겨 놓고 싶은 그 마음이 애처롭게까지 느껴진다. 

이렇게 일본이란 이국에서 죽음을 맞이한 1세들의 무덤은 일본식과 조선식, 불교식과 유교식이 질서없이 뒤섞인, ‘자이니치식(在日式)’이라고 밖에는 달리 부를 방도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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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 이의 말> 

이 글은 재일조선인 서경식(徐京植)이 쓴 『ディアスポラ紀行―追放された者のまなざし』(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 岩波新書961, 2005년의 제1장 「死を思う日」(죽음을 생각하는 날) 중에서 뽑아서 번역한 것이다(글 제목은 번역한 이가 달았다). 이 책의 일부는『디아스포라의 눈』(한승동 번역, 한겨레출판, 2012년)에 수록된 듯하나 번역한 이는 아직 그 한글 번역본을 보지 못했다. 다만 같은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느끼는 것들을 나름 알맞게 바꾸는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감히 기대해 본다. 

저자 서경식

'자이니치(在日)'라고도 하는 재일조선인들은 우리 겨레 근대사의 산물이다. 망국을 겪으면서 뿔뿔이 흩어져 고향을 등 진 조선사람들. 그 디아스로랑 중에 중국에 건너온 조선인들은 오늘의 조선족으로, 원동 연해주에 건너간 이들은 오늘의 고려인으로 된다. 그리고 일본에 건너간 이들은 오늘의 재일조선인으로 된 것이다. 나라를 잃고 일본 땅에서 황국 2등 신민이던 그들은 일본의 투항과 함께 ‘외국인’으로 규정되지만, 남북이 내전을 치르고 있던 반도에는 그들의 나라가 없었고 섬나라의 국적란에는 유령같은 ‘조선’으로만 기입이 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쪽의 이승만은 일본의 조선인들 중에 공산주의자들이 섞여있다는 이유로 재일조선인들의 입국을 거부했고, 북에서는 대거 환영했지만 사회주의 이념에 동조하기 싫은 이들은 오도가도 못하고 일본열도라는 공간에 갇힌, 난민인 듯 난민도 아닌 망명자가 되고 말았다. 

저자는 책에서 ‘조국(祖國)’, ‘고국(故國)’, ‘모국(母國)’ 이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조국은 ‘선조의 출신국’으로, 고국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로, 모국은 ‘현재 ‘국민’ 즉 국적을 가지고 공민 대우를 받는 나라’으로 말이다(책의 102쪽). 한 나라에서 주류라 불리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조국, 고국, 모국은 일치하므로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실이다. 삼위일체라고나 할까. 하지만 재일조선인의 경우 조국은 ‘조선반도’(분단 이전)이다. 고국의 경우, 1세들에게는 조선(혹은 그뒤의 대한제국)이지만 2세, 3세들에게는 일본이 해당된다. 모국의 경우는 더욱 복잡해지는데, 대한민국, 일본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갈리는가 하면 그중에는 호적에 ‘조선’이라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망한 국가로 등록되어 무국적 상태인 자들도 있다. 이러한 분열 속에 담겨있는 제일 큰 문제는, 이 삼자 사이에 지배와 피지배, 대치와 충돌, 과거와 오늘, 가치관과 이데올로기(意识形态)를 둘러싸고 대립과 상극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세 가지 정의에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이 세 개념 자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디아스포라는 이 셋의 분열을 일상적으로 겪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조선족 사회에서도 이 세 단어(개념이 아닌 단어)가 그 뜻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무질서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동화인가 차별인가. 디아스포라의 삶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두 축 가운데서 이루어지지 않을 줄다리기를 거듭하는 과정이지 않은가. 디아스포라 중에서도 누구는 국민에 가까운 삶은 누리고 누구는 망명자에 가까운 삶을 버틸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국경선을 정밀하게 그어놓고, 호적과 여권에 반드시 국적을 기입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디아스포라는 누구나, 더욱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사고를 ‘강요 당하는’ 운명과 마주한다.   

근대국가 속에서 이른바 주류사회가 ‘삼위일체’라는 허상에 기대어 생각없이 스쳐지나는 많은 것들을, 디아스포라는 선천적으로 그 차이가 보이는 눈을 가졌다. 그래서 무덤 하나에서도 묘지석이 걸어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때문에 고민이 찾아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것이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

<일부 정정: 2021년 6월 22일>

저자의 원서가 사실은 한국에서 단행본으로 번역, 출판되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 김혜신 옮김, 돌베개, 2006년). 한국에서는 쉽게 구하여 읽을 수 있을 듯하다. 한겨레출판의 책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번역한 이는 알지 못한다. 일본에서는 비슷해보이는 출판물을 아직 찾지 못했다. 저자는 <한겨레>에 칼럼을 쓰고 있으며 그 번역을 한승동 씨가 하고 있으니 칼럼을 묶어 책을 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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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떠돌면서 듣고 모으고 배우는, 이야기 "꾼"이 되고싶은.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돌다가 고전과 씨름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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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군국주의 일본이 만들려 했던 제국이 실상은 얼마나 헛된 것이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보다도 고향땅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는데 더 큰 비극이 있습니다, 고향으로부터 거절당했으니까요. 제도상으로는 일본 국적은 지금도 바꿀수 있습니다. 현제 4세, 5세에까지 이르러서는 실제로 상당수가 귀화하고 있는 걸로 추정하고 있구요. 다만, 식민지배라는 악이 까발려지니 내팽개치고는 갈 곳 없으면 니발로 다시 악의 편에 와서 머리 숙이고 들어오라는 식은 굉장히 폭력적이지요.

  1. “나는 아렌트의 논지에 깊이 공감한다. 나 자신이 ‘차별받는 자임을 의식하는’ 자로써 살 것을 나에게 요구하여 왔다. 그러나 그 생각과는 별도로, 아렌트가 비판하는 경향이 나의 주변에, 혹은 자칫하면 나 자신 안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매우 와닿습니다. 좋은 번역 덕분에 좋은 글을 읽게 되었네요. 참고로 ‘디아스포라의 눈’은 현재 진행중인 한민족 이산문학 독후감 대회 지정 도서이기도 합니다. https://www.ltikorea.or.kr/kr/board/notice/boardView.do?bbsIdx=13687&pageIndex=1&searchCondition=&searchKey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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