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디움 캠퍼스 예술동, 307호 화실의 일과는 이제 제법 익숙한 리듬을 갖췄다. 예린은 더 이상 재료를 찾느라 두리번거리지 않았고, 현수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붓질 속도만 보고 미디엄을 얼마나 묽게 개어야 할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누나, 이쪽은 미디엄을 좀 더 뻑뻑하게 써야겠어요."
현수의 입에서 ‘누나’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올 때마다, 예린은 북경에서 ‘장 선생님’이라 불리며 뒤집어쓰고 있던 딱딱한 껍데기가 벗겨지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예린은 여전히 그를 ‘현수 씨’라고 불렀다. 그가 다가오는 만큼 적당히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그건 단순한 예의가 아니었다. 복잡하고 어두운 자신의 삶 속으로 그를 너무 깊이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일종의 방어선이었다.
어느 늦은 밤, 화실 구석의 시계가 열한 번을 울리자 현수가 작업대 위의 할로겐 조명을 켰다. 캄캄한 어둠 속, 오직 그 불빛만이 두 사람을 비췄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들이 빛을 받아 금가루처럼 반짝이며 유영했다.
현수는 누가 들을세라 화실 문 쪽을 힐끔 보더니, 예린 쪽으로 몸을 바짝 숙여왔다. 어깨가 닿을 듯 가까워지자 현수가 검지를 입술에 대며 “쉿—” 하고 장난스러운 신호를 보냈다.

"원래 작업실에선 금지인데, 누나한테만 특별히 드릴게요."
낯선 남자의 낮은 저음과 따스한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현수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몰래 숨겨두었던 짙은 녹색 와인병을 꺼냈다.
"‘오퍼스 원’이라는 건데, 지난번 전시 때 선물 받고 마시다 남은 거예요. 버리기 아까우니까 맛만 좀 보실래요?"
현수가 와인병을 들어 불빛에 비춰보았다. 찰랑거리는 액체를 확인하는 그의 얼굴이 예린의 코앞에 있었다. 역광 탓에 현수의 긴 속눈썹 그림자가 뺨 위에 드리워졌고, 그 아찔한 거리에 예린은 순간 숨을 멈췄다. 현수는 남은 술이 얼마 없는 게 아쉬운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예린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현수는 한쪽 벽면 선반에서 새 종이컵 두 개를 꺼내 바닥이 겨우 덮일 정도로만 와인을 따랐다. 예린은 한국 화실의 이런 자유롭고 은밀한 문화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숨 막히던 북경의 화실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현수 씨, 이래도 돼요? 정말요?" "비밀이에요, 우리끼리만."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얽혔다. 어두운 화실 안, 조명 하나 켜놓고 나누는 소곤거림은 마치 세상에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은 묘한 밀실감을 만들어냈다.
예린은 수줍게 잔을 받아 들고 살짝 고개를 돌려 한 모금 머금었다. 혀끝에 닿는 부드러움과 진한 포도 향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 북경에서는 감히 꿈도 못 꿨을, 달콤하고 우아한 맛이었다. 예린은 붉게 물든 입술을 닦으며 화실 한쪽에 세워둔 커다란 새 캔버스 세 개를 응시했다.

"저기, 현수 씨. 나도 이번 공모전에 나가기로 했어요. 오늘 계획서가 통과됐거든요."
현수의 눈동자가 조명 아래서 날카롭게 빛났다.
"드디어 수석 졸업생의 실력을 보는 겁니까? 기대되는데요. 제가 밑색 칠하는 거라도 좀 도와드릴까요?"
예린은 턱끝으로 화실 구석 어둠 속에 잠긴 거대한 실루엣을 가리켰다.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나 연민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을 억눌러왔던 북경의 정제된 기교를 벗어던지고, 저 거친 야수 같은 그림과 정면으로 부딪쳐보고 싶다는 순수한 승부욕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그림이 현수가 평생을 부정당하며 흘린 피눈물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예린은 마치 강력한 적수를 만난 검투사처럼 눈을 반짝였다.
"아니요. 이번엔 내 방식대로 저 방진포 속의 '괴물'과 제대로 한판 붙어보고 싶거든요."
예린은 쥐고 있던 종이컵을 들어 건배하듯 그 어둠을 향해 내밀었다.
"현수 씨가 저렇게 꽁꽁 숨겨둘 만큼 아끼는 비장의 무기라면, 충분히 도전해볼 가치가 있겠죠. 안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흥분과 자신감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현수의 그림이 가진 파괴력을 단순한 '재능의 폭발'로만 해석하고 있었다. 그 폭발이 살기 위한 처절한 비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예린은 잔인할 만큼 해맑게 자신의 전술을 늘어놓았다.
"기대해요, 현수 씨. 저 방진포가 걷히는 날, 그 옆에 걸릴 내 그림이 저 녀석을 어떻게 잡아먹는지 보여줄 테니까."
예린의 당찬 선전포고에 현수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제 그림이랑 붙어보겠다고요? 그거 아주 위험한 생각인데. 저 천이 벗겨지는 날, 누나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충격적일 수도 있어요."
"충격이라면 이미 현수 씨 소매에 묻은 그 파란 물감만으로도 충분히 느꼈어요. 현수 씨 작업이 캔버스 밖으로 튀어 나가는 '폭발'이라면, 나는 반대로 캔버스 안으로 깊게 가라앉는 '침잠'으로 승부할 거예요."
예린은 낡은 나이프를 집어 들고 팔레트 위의 차가운 인디고 물감을 짓이겼다.
"얇고 투명하게, 수십 번 덧칠해서 깊은 물속 같은 느낌을 낼 거예요. 가장 어두운 색 밑에 깔린 붓질이 은근하게 비쳐 보일 때, 그게 더 지독하게 마음을 옥죄는 느낌을 주거든요. 덮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처럼요."
"흥미롭네요. 보통은 그림으로 탈출구를 찾으려고 하는데, 누나는 오히려 그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것 같군요. 그게 누나가 생각하는 예술입니까?"
"가두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만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는 거예요. 현수 씨처럼 소리 지르지 않아도, 고요함만으로 사람을 숨 막히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거든요. 소리는 금방 사라지지만, 잔상은 더 오래 남으니까요."
현수는 예린의 단호한 태도에 묘한 자극을 받은 듯, 그녀 곁에 서서 한참 동안 빈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예린이 캔버스 속에 가두고 싶어 하는 것이 단순한 색채가 아니라, 차마 밖으로 내지 못한 그녀의 비명임을 짐작하는 눈치였다.
"그 고요함이 비명보다 더 잔인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조심해요. 투명하게 덧칠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속마음을 낱낱이 기록하는 일이니까. 누나가 숨기고 싶어 하는 그 사실들이 견디기 힘들 만큼 선명하게 보일지도 몰라요."
예린은 그가 던진 경고를 곱씹으며 종이컵에 남은 마지막 와인을 털어 넣었다. 기름 냄새와 와인의 향기가 섞여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제 현수의 보조가 아니라, 그와 동등하게 붓을 든 한 명의 작가로서 그곳에 서 있었다.
"이제 정말 내 그림을 시작해야겠어요."
예린은 화실을 나서며 자신의 옷깃에 묻은 짙은 남색 물감을 확인했다. 현수가 보여준 거친 폭발과는 다른, 오직 자신만이 낼 수 있는 지독하고 서늘한 침묵의 색이었다. 내일부터는 이 하얀 캔버스 위에 자신의 '진실'을 하나씩 새겨 넣어야 한다.

화실을 나와 숙소로 향하는 긴 복도. 예린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천장의 센서등이 ‘탁, 탁’ 소리를 내며 순차적으로 켜졌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길이 빛으로 열리는 그 광경은 마치 그녀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알 수 없지만 기꺼이 가보고 싶은 미지의 캔버스 같았다.
화실 벽시계의 건조한 진자 소리보다 더 무겁게 울리는 심장 박동이 귓가를 때렸다. 그것은 더 이상 낯선 타국에서의 불안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가두고 비로소 폭발시킬 준비를 마친 예술가의 뜨거운 전율이었다. 예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토록 선명하게 살아 뛰는 설렘을 안고, 그녀는 내일 아침 마주할 백색의 공포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つづく
「本小说为作者独立创作的虚构故事,所有人物、情节、背景均为艺术加工,与现实中的任何个人、团体或事件无任何关联。若有巧合,纯属偶然。
본 소설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창작한 허구적 이야기로, 모든 인물·줄거리·배경은 예술적 가공의 결과이며, 현실 속 개인·단체·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 유사점이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연입니다.」
금기된 캔버스
제1장: 새로운 생활의 캔버스
제2장: 빗속의 만남
제3장: 색채의 공명
제4장: 그라데이션 컬러
제5장: 심연의 대화
제6장: 기교의 감옥, 빗장 너머의 시선
제7장: 박제된 초상과 소주 한잔
제8장: 뭉개진 형상, 주체의 탄생
제9장: 비명과 침묵의 밸런스
제10장: 남편의 방문, 그리고 해석된 비명
제11장: 증명된 <갈망>, 그리고 빗속의 동행
제12장: 거짓 없는 몸, 잔인한 기적
제13장: 무너진 유예, 다시 쓴 가면
제14장: 깨진 독, 쏟아진 기만
제15장: 하늘에 흩뿌린 거짓말
제16장: 가장 안전한 공범
제17장: 지워진 흔적, 차가운 다짐
제18장: 황금 감옥의 대가
제19장: 회색의 시간을 넘어
제20장: 비로소 채워진 캔버스 (最終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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